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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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명예교수 / 시인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이 있었다. 그 빈부갈등은 인류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다. 홍익인간이니 인내천이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들도 필시 그 갈등과 더불어 움텄을 것이다. 빈부격차가 심해질수록 가난의 문제는 우리에게 더 심각하게 다가온다.

밑이 째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있다. 밑이라는 말은 더러 성기를 뜻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항문을 일컫는다. 요즘 사람들 중에는 가난과 항문과의 관계를 잘 모르는 이가 많다. 먹은 걸 배설해버리면 뱃속을 또 채워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뒤(밑)가 마려워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아야 하는 것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참다보면 변비가 심해지고 그러다가 밑이 째질 수밖에 없었다. ‘30년대 강경애의 소설 ‘적빈’에도 배변을 참느라고 깡충거리며 걷는 주인공의 안간힘이 리얼하다.

우리 문학에서 흥부는 가난의 상징이다. 착한 것 말고는 가난하게 살 이유가 없는 흥부였다. 흥부 내외가 마을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도 한 달에 9끼니 먹기가 어려웠던 건 놀부로 상징되는 천민자본주의의 착취구조 탓이었기에 흥부가를 즐기던 청중들은 흥부의 가난을 남 일로만 여기지는 않았다.

흥부가에는 흥부네 집의 쥐들이 먹거리를 찾아 집안을 뒤지고 다니다가 마침내는 다리에 가래톳이 서고, 가래톳 선 쥐들의 끙끙 앓는 소리로 마을 사람들이 잠을 설친다는 대목이 있다. 요즘의 흥부가 청중들은 그 대목을 들으면서 가볍게 웃고 말겠지만 옛날의 흥부가 청중들은 가래톳 선 쥐들의 끙끙 앓는 소리를 우스개로 즐기면서도 먹거리를 찾다 지친 자신들의 참담함을 쓰라리게 되새겼을 것이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는 말이 있다. 가난의 원인을 당사자들의 개인적인 미련함·게으름·낭비벽 등등에 근거를 두고자 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그것은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포기해버리는, 원망할 테면 하늘한테나 하라는, 가난을 숙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라는 참으로 음험한 말이다. 부정부패나 봉건시대의 고질적인 착취 구조 같은 것들을 희석시키려는 그 음험한 말은 지금도 이 나라에서 흥부시대처럼 톡톡히 제 구실을 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제일 높고 자살의 상당 부분이 가난과 상대적 박탈감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밑이 째지던 우리의 절망적인 가난은 과연 옛날얘기에 불과한가? 밀린 집세와 공과금이 담긴 돈 봉투를 유서와 함께 두고 자살한 송파 세 모녀의 눈물겨운 절망이 얼마 전에도 있었다. 가난 때문에 집단 자살하는 일이 요즘 이 나라에 어디 한두 번이던가.

대선 공약이던 증세 없는 복지 대신 복지 없는 증세를 하면서도 정부는 증세가 아닌 척하느라 온갖 꼼수를 다 부린다. 담배세를 그렇게 허망하게 올려버리고도 무엇을 또 얼마나 더 올릴 작정인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도 우긴다. 증세 논란은 담뱃값 올리기 전에 했어야 마땅하다.

이런저런 증세 논란의 중심에 현행 법인세율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증세는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대통령의 최근의 입장은 백 번 천 번 옳다. 그것이 함부로 증세를 해버린 뒤끝이 아니라면, 그리고 법인세율을 끝끝내 동결하려는 안간힘이 아니라면 말이다.

공산주의가 야만의 끝에 이른 게 북한이고 자본주의가 야만의 끝에 이른 게 한국이라는 말이 꼭 악의적인 양비론만은 아니지 싶어 우리의 가난이 벼랑 끝처럼 아슬아슬한데, 요즘의 증세 논란의 꼼수도 그 안간힘도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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