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잿더미 공장 살려 신뢰 경영으로 성공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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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 딛고 일본 최고 수준의 방음시트 제조업체로 성장...제주 긍지 높인 기업인 평가
   
▲아버지에게 인생과 경영을 배우다=해방 직전인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고영관 ㈜다카야마카세이(高山化成) 회장에게 아버지는 각별하다. 어릴 때부터 존경해온 인물로, 굴곡 많은 인생과 회사 경영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존재와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릴 때 자란 타카이시(高石)에는 동포들이 거의 살지 않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각종 재일동포 단체 요직을 두루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일본인 동창생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친화력 있는 모범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현재 일본에서 인정받는 방음시트 제조업체로 성장한 회사도 아버지와 함께 시작한 비닐공장에서 출발해 일궈냈으며, 무엇보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과 가르침이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가장 큰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출신인 아버지는 1930년 전후인 16살때 일본으로 건너온 후 재일제주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오사카 쯔루하시 이쿠노구 근처의 조그만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립 기반을 마련해 고무공장을 차렸다.

당시 고무공업과 방적공업이 발달했던 오사카에는 많은 재일제주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열악한 노동 여건 속에서도 생산설비가 간단하고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고무공장을 차려 생계를 이어가거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고 회장의 아버지 역시 힘들게 고무공장을 차려 악착같이 일했다. 하지만 고 회장이 대학을 졸업하는 1965년에 점포에 화재가 나면서 간판을 내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비닐공장으로 새출발하다=당시 확정된 취업 자리를 포기한 고 회장은 “다시 한번 해보자”며 아버지를 도와 비닐공장을 재건하기로 결심했다. 바닥에서 다시 일어선 ‘다카야마카세이’ 50년의 출발점이었다.

아버지는 전적으로 공장 운영을 고 회장에게 맡겨 경영 후원자로 나섰고, 그는 오로지 일에 집중했다. 대학시절 학생회장으로 활동했던 그였기에 공장 일에 뛰어든 직후 땀투성이인 작업복과 고무장화를 신고 트럭을 타고 다니는 모습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탄탄한 회사로 키우겠다는 일념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의 열정적인 노력에 힘입어 회사는 차근차근 성장 계단을 밟아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동종 업체간 치열해지는 경쟁과 대형 제조업체 등장 등으로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워지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고심도 깊어져 갔다.

‘대형 회사의 하청업체로 계속 간다면 위험이 너무 큰 만큼 경기를 타지 않은 특화한 제품을 찾아야 해.’

중소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기업이 할 수 없는 틈새시장에서 특화된 상품으로 승부를 걸어야 승산이 있다는 생각 끝에 그는 1970년대 들어 법인화를 전환점으로 해 차량용 방음시트 생산에 착수했다.

고 사장이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과 노하우로 만들어낸 방음시트는 고무 대신에 비닐을 재료로 사용하면서 저렴한 가격에다 품질 효과까지 뛰어나다는 점에서 기존 제품과 확실하게 차별화됐다.

우선적으로 일본 최고의 자동차 업체인 도요타가 시험적으로 제품을 쓸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부풀기 시작했다.

▲최고의 방음시트 제조업체로 성장=고 회장은 2년 여에 걸쳐 차량용 방음시트 제품을 보완한 끝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 제조업 시장에서 인정받는 최상의 고품질 제품을 만들어냈다. 이에 도요타를 시작으로 대량 납품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도요타에서 만드는 자동차 70% 정도가 다카야마카세이의 방음시트 제품을 사용할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자 닛산과 마쓰다 등 다른 자동차 생산업체에서도 주문이 몰려들었다.

이에 힘입어 1999년 중국 칭타오에 합작회사가 만들어진데 이어 2001년에는 일본 미에노현 우에노시에 5600평 규모의 공장이 설립되면서 대량 양산 체제를 구축, 성장세는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첫 해 100t 정도에 불과하던 생산 물량은 어느덧 100배 이상인 1만t 이상으로 급증했는가 하면 일본 자동차 업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기아차 등에도 납품할 정도로 최고의 방음시트 제조업체로 발돋움했다.

고 회장은 설비 증설과 함께 차량용 방음시트에 이은 신제품이 필요하다고 보고 비닐 타일과 라미네이트 등의 건축자재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품질을 앞세운 이들 제품 역시 일본에서 내로라 하는 주택건설 대기업인 세키스이주택 등에 납품하면서 인지도를 더욱 높였다.

고 회장은 “대기업이 할 수 없는 틈새시장을 연구해 안정적인 상품을 제공하는 기술력으로 신용을 쌓아온 게 지금까지 성장을 이뤄낸 원동력”이라고 웃음을 지어보였다.

▲신뢰 경영으로 일궈낸 결실=올해로 창립 50주년인 다카야마카세이의 반세기를 돌아보는 고 회장의 감회도 남다르다. 창업 당시 5명이었던 직원은 어느덧 150명으로 늘어났고 몇 천엔에 불과했던 매출액 역시 35억엔으로 급증하는 의미있는 결실을 일궈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결실 뒤에는 신뢰를 우선시하는 고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거래업체 사이에서 다카야마카세이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납품기한을 지키는 업체’로 통할 정도로 무한한 신뢰감을 얻고 있다.

또 안정적인 재활용 자재 확보 뿐만 아니라 어음 발행에 따른 자금 유동성 위기를 없애기 위해 재료 공급업체와 현금으로만 철저하게 거래하면서 동업자와 같은 신뢰 관계를 유지해온 게 동반 성장을 하는 자양분이 됐다.

제품 품질에 있어서도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작업라인을 정비해 2000년에 ISO(국제표준화기구) 9002 인증을 획득한데 이어 중소기업 경영혁신 인증과 ISO 9001 인증까지 취득하면서 ‘믿을 수 있는 기업, 쓰고 싶은 제품’이라는 믿음을 더욱 확고히 했다.

고 회장이 일관되게 지켜온 신뢰 경영은 일본 제조업계에서 한국인의 긍지를 보여준 모범적인 기업인이라는 평가와 함께 2007년 재일한국상공회의소 45주년을 맞아 외교통상부장관 표창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기업가 정신과 제주=시대 변화에 맞는 새로운 발상과 축적된 기술력으로 비닐과 고무 등의 폐자재를 재활용한 환경 리사이클 제품을 생산해온지 어언 50년.

고 회장은 그동안 굴곡 많았던 반세기를 돌아보며 “사회에 공헌하지 않는 기업은 존속할 수 없으며, 기업은 개인 것이 아니라 사회 것이기 때문에 사회 표준에 맞춰 경영해야 한다”며 기업의 사회적 역할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했다.

그가 화성비닐조합 회장 직을 맡아 장애인 지원 등의 사회 공헌활동을 해온 것도,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재일동포 기업과 자영업을 하는 동포들의 조직체인 ‘킨키경우납세연합회’ 부회장직과 관서제주도민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오사카 한국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아 활동을 해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사카 한국상공회의소는 일본 내 재일동포 사회에서 처음 만들어진 상공단체로, 고 회장이 상의 회장을 맡은 2012년에는 제주상공회의소와 뜻 깊은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상호 교류 확대에 나서고 있다.

고 회장은 고향 제주에 대해서도 ‘존경하는 아버지의 고향이자 뿌리’로 생각하면서 성묘 등을 위해 연 2~3회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 비해 제주가 많이 변했고 발전했다”며 지리적으로 좋은 이점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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