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제주~오사카 직항 개통...24년 숙원 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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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병원, 남양방송, 제주은행 등 잇따라 설립돼
   
                                 제주은행 창립 당일 영업부 모습

1968년 제주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승격되면서 제주는 새로운 도약을 꿈꿀 수 있게 됐다.


특히 국제공항 승격으로 광복 이후 끊겼던 일본과의 교통편이 부활함으로써 15만 재일교포와 고향 제주에 있는 가족들에게 부푼 희망을 안겨줬다.


이 시기에 도내 첫 사립병원인 나사로병원이 개원하고, 남양방송이 전파를 쏘아올린 데다 지방은행인 제주은행까지 영업에 나서면서 도민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국제공항 승격과 첫 국제선 취항=1968년 3월 5일 정부는 제주비행장을 국제공항으로 승격시키고 제주~오사카 간 항로 신설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내 항공망 확충 계획 개정안을 마련했다.


3월 11일에는 교통부 관계자가 내도해 제주시 일원을 살핀 후 기술적인 검토 결과 국제공항으로서의 부지는 현재의 제주공항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연내 교차 활주로 공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이어 4월 16일 정부는 제주비행장을 국제공항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일사천리로 국제항공노선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다 8월 2일 서울을 방문하고 귀임한 구자춘 지사는 “이달 안에 대한항공 소속 F27기가 제주~오사카를 잇는 국제선에 취항하게 될 것”이라고 밝혀 도민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그러나 해를 넘겨도 제주국제공항 시설 확충 공사는 거북이걸음이었고, 국제선 개통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마침내 1969년 10월 7일 대한항공이 제주~오사카 간 국제항로에 취항했다.


이날 오전 10시5분 대한항공 YS11기 제953편이 오사카행 승객 10명과 부산행 40명을 싣고 이륙하면서 제주 항공사에 한 획을 긋게 됐다.


제주일보의 전신인 제주신문은 ‘15만 재일교포와 도내에 있는 그들 부모형제들과의 시간적 거리를 1일권으로 단축했다. 일본과 제주의 직접 교통편이 막힌 해방 후부터 24년이나 걸린 숙원이 이뤄졌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외국 관광객을 직접 본도로 유치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제주~오사카 노선은 화·목요일 부산을 경유해 두 차례 왕복 운항됐고, 편도 소요시간은 부산 기착 40분을 포함해 3시간40분이었다.


초기 승객은 재일교포가 대부분이었는데, 1일 20여 명에 그쳐 노선 유지가 관건으로 떠올랐다.


▲넓어지는 선택의 폭=1968년 7월 16일 제주 최초의 사설 종합병원인 나사로병원이 개원했다.


이날 문을 연 나사로병원은 병실 70개(환자 침대 100개) 규모로, 내·외국인 7명으로 구성된 나사로재단이 만들었다.


제주일보의 전신인 제주신문은 이날 ‘그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기독교 종합병원으로서 결핵 무료 진료, 풍토병 연구사업을 통해 도민 보건 향상에 이바지하겠다’는 문종후 병원장의 다짐을 전했다.


나사로병원의 진료 과목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소아과, 피부과, 안과, 방사서나, 심전기과 등으로, 실제 진료는 17일부터 시작됐다.


제주일보의 전신인 제주신문은 그해 9월 14일자를 통해 도내 최초의 상업방송인 남양방송(NBS·대표이사 박태훈) 개국 소식을 전했다.


남양문화방송(MBC)과 라디오 프로그램 네트워크 계약을 체결한 남양방송은 이날 정오를 기해 호출부호 HLAJ, 주파수 770㎑, 출력 10㎾로 ‘NBS 탄생’을 전파에 실어 보냄으로써 그 존재를 알렸다.


남양방송은 1일 방송시간은 18시간이었는데, 자체 프로그램 6시간25분, MBC 중계 11시간35분으로 구성됐다.


남양방송 개국으로 제주에서도 공·민영 방송 간 경쟁시대의 막이 올랐다.


남양방송은 1971년 10월 1일부터 남양문화방송주식회사(MBC)로 변경됐다.


1969년 9월 19일에는 국내 지방은행 가운데 다섯 번째로 제주은행이 개점했다.


재일교포들의 출자로 설립된 제주은행의 초대 은행장은 김봉학이 맡았다.


이에 앞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제주은행은 민간 자본을 집대성하고 지방산업 발전을 도모함을 취지로 내걸었다.


개점 당일 박정희 대통령이 첫 손님으로 예금한 것을 비롯해 1385구좌에 1억4200만원의 예금고를 올렸다.


이후 제주은행은 도민사회와 함께 하며 성장해 나갔지만 외환위기 때 어려움을 겪은 후 2002년 신한금융지주회사의 자회사로 편입된다.


1969년의 마지막은 시내전화가 장식했다.


제주일보의 전신인 제주신문은 1969년 12월 29일자를 통해 ‘28일 자정을 기해 우선적으로 제주시 1600회선의 시내전화가 자동식으로 교체됐다’고 알렸다.


1925년 100회선의 전화를 자석식 교환방식으로 개통한 제주지역은 1962년 공전식으로 변경한데 이어 제주에 전화가 들어온 지 44년 만에 자동화시대를 맞은 것이다.


이로써 통화시설의 현대화는 물론 수요에 대한 공급률도 77.5%에서 93.5%로 향상시키게 됐고, 도수제 사용으로 가입자 요금 부담도 공평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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