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재일 코리언'으로 살아온 세월, 연구.탐구의 치열함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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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련 활동한 나 때문에 교편 잡은 동생에게 피해 지금껏 미안한 마음 뿐"
   

1.한국전쟁 중 오사카로 밀항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제주시 삼양동에서 태어난 강재언 교수(90)는 제주북교를 졸업하고 5년제인 제주농업학교에 진학했으나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4년만에 졸업하고, 징병을 피해 다니다 해방이 되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의 졸업동기 50명 중에는 태평양전쟁에 징집되거나, 4.3으로 인해, 한국전쟁 등으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희생자가 유난히 많았다.

 

일본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작은 빌라 자택에 만난 강 교수는 “나는 부모님이 전부 돌아가실 때 곁을 지키지 못한 불효자이고 나 때문에 동생들이 많은 고초를 겪게 만들어 미안할 따름이다”고 말해 굴곡진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을 나타냈다.

 

해방 후 서울의 동국대로 진학한 그는 독립운동가 여운형이 주도하는 근로인민당 창당에 관여한 학생운동지도부의 일원이었다. 마침 여운형의 주변에는 강문석(김달삼의 장인), 송설철, 고경흠(미스탐라출신 고려진씨의 부친) 등 제주출신 좌익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서울명동에서 우익계 서북학련으로부터 대낮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제주에서 4.3사건이 발생하자 서울에 있던 제주출신 유학생들이 모여 만든 잡지 ‘백록’을 통해 4.3의 학살극 실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 공안당국으로부터 수배를 받게 됐고 서울대를 다니던 남동생과 헤어져 청주까지 피신을 가 잠시 고교교사를 지냈다.

 

그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이승만 정권을 위해 동족을 향해 총을 들 수 없어 바로 친척이 있는 일본 오사카로 밀항을 했다.

 

서울에 홀로 남겨졌던 남동생은 한참 후 생사를 확인해 보니 의용군으로 징집돼 북으로 갔고, 제주의 남동생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11기로 전두환.노탱 전 대통령과 동기)했으며 아직도 미혼인 막내 여동생은 미국의 의과대학로 진학하면서 4남매가 뿔뿔이 흩어졌다.

 

강 교수는 “해방전에는 징집을 피하려 수원농고에 진학하고, 대학진학위해 제주를 떠난 1945년 이후 지금까지 70년간 가족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없었다”며 “북에 있는 동생은 얼마전 까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으나 이제 껏 얼굴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육사를 나와 육사에서 교편을 잡던 동생은 당시 조총련 활동을 하던 나 때문에 육사교수로 임용되지 못하는 피해를 입었다”며 동생에 대해 미안해했다.

 

1950년 오사카에 온 그는 제주고향사람들이 제주출신중 한명이라도 대학에 다녀야한다며 도움을 줬으나 밀항자 신분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오사카상과대학(현 오사카시립대)학장의 도움으로 경제학과에 진학했는데 전교생 가운데 한국인 출신은 강 교수가 유일했다.

 

2.경제학도에서 역사학도로 전환

“한국전쟁에 관심을 갖는 교수와 학생들이 전쟁중인 조국에 대해 많이 물어왔지만 일제강점기 황국신민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한국의 역사 역시 모두 식민사관에 입각한 것이어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강 교수는 “일본내 조선문화협회에서 조선평론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조선의 역사는 사대주의와 타율적이어서 자립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며 “이에 충격을 받아 조선은 자주적인 나라다라는 반론을 펴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중국과 일본과 다른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고, 말과 글이 있는 민족이고, 유교와 불교문화 역시 다른데 왜 그런 논리가 지배하고 있나 하는 의문에서 시작한 것이 조선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조선 역사에 대한 공부는 스승도, 자료도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출발해야 했다. 한국이 아닌 이국땅에서 조선의 역사에 대한 원전이나 연구논문을 구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강 교수는 대학을 졸업하자 고베 중앙도서관에 조선의 역사에 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청구문고, 교토대 사학연구회를 드나들며 1년간 연구한 첫 논문 <봉건체제해체기의 농민전쟁>을 일본의 학술지에 발표했다. 그 논문이 다시 한국에서 발표되면서 강재언이라는 재일 사학자의 존재를 알리게 했다.

 

동학당을 농민전쟁으로 기술한 강 교수의 이 논문은 조선의 봉건체제 해체를 촉진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출하기 위한 농민전쟁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것이었다.

 

지금은 강 교수의 이같은 논리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식민사관에 젖어 있던 국내 역사학계에서 볼 때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견해였다.

 

한국사람으로 정체성이 분명했던 강 교수는 일본에 귀화해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할 생각이 없었고 1953년부터 1968년 인연을 끊을 때 까지 조총련 활동에 집중했다.

 

조총련계열의 통신사, 잡지사, 연구소에 근무하며 일본인과 한국어를 모르는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계몽서를 펴내거나 한국문제를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론 일본학자들에 맞서 싸우는 민족운동을 벌였다.

 

그 시기에 강 교수는 조총련내부와 사상적 갈등과 투쟁은 불가피 했고 김일성과 그 가족을 신격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한 것을 역사학자로 용인할 수 없었고 북한의 현실은 그가 공부한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어 결국 결별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조총련과의 결별은 경제활동의 단절로 이어져 몇 년간은 고독을 술로 달래며 연구에 몰두했다. 1970년에 출간된 <한국근대사연구>(한울)을 비롯해 칩거기간에 4-5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펴냈다.

 

요즘은 한국인 출신도 전임교원을 본명으로 대학교수로 임용하지만 1970년대 까지는 한국인은 비상근강사(시간강사)나 조수(조교)가 고작이었고, 그 역시 교토대학, 오사카대학, 오사카시립대학, 북으로는 홋카이도대학, 남으로는 류큐대학에서 10년간 보따리 강사생활을 해야 했다.

 

강 교수는 “내 나이 58세 때인 1984년에야 교토의 하나조노 대학에 촉탁교수로 임용돼 한 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81년 조국을 떠난 지 30년만에 고고학자 이진희, 소설가 김달수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5명의 재일동포 사형수를 비롯한 정치범, 이른바 간첩들에 관대한 조처를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그 덕분인지 다음해 사형수 전원이 감형되고 몇 년후 석방되는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강 교수는 1983년 한국국적을 취득했다.

 

3. 총련탈퇴 한국근대사상연구에 몰두

그가 걸어온 길은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우리 근대사, 근대사상의 뿌리를 찾아 그 사상의 광맥을 캐어내고, 찾아내고, 싸워 온 고투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나고 자라, 20대에 일본을 건너가 평생 재일 코리안으로 살았던 그이기에 그의 연구와 탐구가 더욱 일관된 치열함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저서들은 다시 바다를 건너 1970년와 80년대 시대를 고뇌했던 한국의 한 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연구는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회과학적 방법론과 해방이후 절멸했던 한국 근대사상사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근대사연구를 펴낸 후 한국근대사의 밑바닥에 흐르는 사상의 맥락을 체계화하는 연구에 집중한 강 교수는 단순한 외압과 그에 대한 항거라는 역학적 관계가 아니라 각종 형태의 운동과 연결되는 사상과 그 상호관계에 대한 문제를 정리한 역작인 <한국의 근대사상(한길사)>을 내놓았다.

 

근대 한국의 여러 가지 사상조류 속에서 근대지향적인 사상조류로 강 교수가 주목한 것이 개화사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개화운동이었다. 즉 개화운동의 좌절이 자력에 의한 근대화의 좌절이며 식민지화에 연결된다는 관점이다. 이 문제를 집중 조명한 저서가 <한국의 개화사상>(비봉)이다.

 

선비의 나라 조선유교 2천년은 한국을 대표하는 책 100권에 선정돼 2005년 독일 프랑크프르트에서 열린 국제도서전에 출품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강 교수는 조선의 유교와 근대, 한국근대의 변혁운동, 조선의 서학사, 한국유학2천년에 이르기까지 30여권의 저서를 냈고 전부 한국에서 번역출간됐으나 유일하게 번역 출간하지 않은 저서가 바로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1997년)이다.

 

강 교수는 “북한의 유일사상을 비판하고 김일성의 독립운동이 대단한 것이 아니며, 유일사상체제를 위해 근현대사를 왜곡한 것을 비판한 실증연구서”라며 “총련을 탈퇴한 1968년부터 주로 중국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취재해 1997년에 일본글로 발간했으니 30년이 걸린 셈”이라고 말했다.

 

<조선서학사>에서는 18세기에 이익, 북학파, 정약용에 의해 수용되던 서학이 19세기 들어와 좌절되면서 일본의 식민지지배의 길로 들어섰는데 서학수용의 좌절 원인으로 조선 유학의 주자일존주의에 있음을 지적했다.

 

강 교수는 “조선의 유교, 특히 주자일존주의 사상이 근대 조선의 성장을 가로막았다”며 “사상의 다양성, 학문의 개방성이 있어야 나라가 발전하는데 그것이 없었다”고 한국의 사상사를 연구한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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