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무대 내려 온 발레리나, 새 주인공 위한 길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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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김길리씨

누군가는 희망이나 이상을 좇아 자신이 살던 둥지를 과감히 떠나지만 또 누군가는 포기해야만 하는 꿈의 또 다른 완성 장소로 익숙하지 않은 곳을 선택하기도 한다.


제주 역시 아주 먼 옛날부터 간직해 온 오채영롱함 때문에 어떤 이에게는 낭만의 섬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해주는 치유의 섬이 된다.


무용가 김길리씨(36)는 발레리나였다. 그는 무용을 하는 이모로 인해 자주 발레를 보게 됐고 초등학생 때 자연스럽게 발레를 시작했다. 그러다 고교시절 관람한 러시아 볼쇼이발레단의 갈라 공연에 매료돼 기필코 러시아까지 가고 만 그는 어쩌면 꿈 앞에서만큼은 ‘근성의 여인’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학과 교수님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하고 싶었던 무용의 꿈을 맘껏 펼쳐 보일 수 있었다”는 그는 “내가 가진 재능에 비해 과분히 따라 준 운 덕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무용가 김길리씨의 러시아 유학시절 모습.

대학 진학 후 러시아 페름국립학교에서 정통의 발레와 몸으로 만나게 된 것도 단순히 운(運)만 따라 줘서 였을까. 그 운이라는 것 역시 기회를 준비하는 자에게만 뒤따르는 법이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득하게 되는 이치 중 하나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발레의 근원지였던 이탈리아보다 부흥의 기반으로 발레의 새 역사를 쓴 러시아에서 정통의 과정을 익히고 싶었다”는 그는 “그런데 막상 러시아로 떠나려니 새로운 세상과 만나야 한다는 무게감과 두려움이 잠시 나를 주춤하게 만들었다”며 그 순간 꿈의 질적 성장을 위해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부모님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표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새롭게 그릴 꿈을 가슴에 안고 입학한 페름국립발레학교는 바가노바·볼쇼이와 함께 러시아 3대 발레학교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발레 양성 시스템인 ‘바가노바’ 과정을 습득하면서 그동안 켜켜이 쌓아 온 꿈의 공간을 천천히 넓혀갔다.


크고 작은 무대에서 주연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공연을 펼쳐오던 그가 러시아에서 돌아왔을때는 한국을 떠날 당시와는 사뭇 다른 그로 변해 있었다.


“발레가 천성이라고 믿고 성장해 온 내가 나보다 월등히 좋은 신체조건의 다른 무용수들에게 무대를 양보해야 한다고 마음먹기까지 힘든 시간도 있었다”는 그는 “하지만 러시아는 무대의 주인공이길 원하는 이들의 꿈을 지원·육성하는 지도자로서 제2의 꿈을 완성시켜 준 뜻 깊은 곳이다”고 말했다.


유학과 결혼 등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쉴 새 없이 달려온 덕분인지 몸에서 잠시 쉬어가야겠다는 신호를 보내올 때쯤인 2011년, 그는 자연·사람이 좋다는 제주로 옮겨왔다.


“제주에서 전시·미술·음악과 관련된 예술 분야는 대중화 돼 있어 곳곳에서 열리는 공연·전시도 꽤 많다”는 그는 “반면 발레는 왠지 범접하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느낌 때문인지 누구나 들락거릴 수 있는 편안한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며 발레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이곳 제주에서 발레의 대중화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난해 ㈔한국발레협회 제주지회의 장을 맡아 소소한 영역에서부터 발레를 얘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의 첫 번째는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초등학교에서 진행된 ‘찾아가는 발레교실’이다.


2011년 제주에 정착한 김길리씨는 인재 양성을 위해 지도자로서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은 발레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그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학원시설 하나 변변치 않은, 문화 소외지역으로 직접 찾아가 아이들과 소통하며 ‘발레’라는 그림을 점점 크게 그려 나가고 있다. 그러다보면 발레가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친근한 춤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또 하나의 큰일도 계획 중이다. 사실 시중에는 제주의 신화를 활용한 수많은 전시·공연들이 즐비해 있지만 그는 그만의 격식을 갖춘 ‘우아한’ 공연을 스케치하고 있다.


제주의 상징인 해녀와 설문대 할망 신화를 클래식한 피아노 선율에 맞춰 발레라는 춤으로 말하고 싶다는 그는 발레리나를 꿈꾸는 제주의 청소년들이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오로지 하나의 꿈만을 위해 달려온 발레리나, 방향을 조금 틀었지만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어린이들을 힘껏 응원하고 있는 무용인, 김길리. 그는 발레를 통해 제주를 찾는 제주인들에게 제주의 이야기를 또 다른 방식으로 전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 쯤의 제주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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