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앞으로 인생 목표는 제주 발전에 힘 보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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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정 사장, 남미 멕시코 시장 개척 주력...제주-중국 이우 교류 확대, 제주상품관 활성화 노력
 
   

2013년 10월 중국 저장성 이우시에서 열린 제19회 이우국제소상품 박람회에 참석한 고희정 사장.(사진 왼쪽)

고희정 사장이 이우 한인회장을 맡았던 2007년 중국은행 이우본점과 한국상인회 간 상호 협력 협약을 체결하는 모습.(사진 위) 고희정 사장이 운영했던 양말 제조 공장 생산라인.(사진 아래)

 

중국에 진출한 제주인 가운데 가장 맏형격인 고희정 전 중국 이우한인회장(64·유진무역유한공사 사장).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갑작스러운 가정의 어려움, 고교 시절 방황, 월남전 참전, 중국 진출, 사업 성공과 실패,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앞으로 그의 인생 목표는 고향 제주 발전에 마지막 힘을 보태는 일이다.


   
고희정 유진무역유한공사 사장. 고 사장은 중국서 양말 제조업을 시작, 직원 500명에 연 수출액만 1000만달 러에 이르기도 했으며 현재 남미 시장을 대상으로 무역업을 하고 있다.

▲하면 된다(Noting impossible)=그는 제주남초등학교와 제주제일중, 제주제일고를 졸업했다. 그의 집은 제주시 중심가의 부유한 가정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시설 제주도에서 20명만 선발되는 소년단에 뽑혀 서울을 방문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부모님과 헤어져 살 수밖에 없게 됐다. 고교시절 방황하던 그는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는 1971년 청룡부대 전투병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그는 생사를 오가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끝내 살아 돌아 왔고, 그때 ‘하면 된다(Noting impossible)’라는 평생의 좌우명을 얻었다.


그는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그곳에서 살아 나왔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밑바탕이 됐다”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내일 죽는다고 해도 두렵지 않다’라는 신념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제대 후 서울에서 섬유 수출회사, 일본 기업 등 여러 회사를 다녔고, 많은 사업을 시도했다. 도전과 실패를 반복했지만 그는 결코 후회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중국에 던진 도전장=그가 중국에 진출한 시기는 50세가 거의 다되던 1999년이다. 당시 갑작스럽게 집안에 큰 문제가 생겼고, 회사를 그만두고 휴식 차 친구가 있는 중국을 찾았다. 그는 그렇게 중국 천진에 자리를 잡게 됐다.


그가 처음 손을 댄 사업은 남대문에서 옷을 떼다가 중국에 파는 의류 유통업이었다. 중국도 잘 몰랐고, 중국말도 전혀 못했지만 그는 뚝심 있게 밀어 붙였고 생각보다 잘됐다.


그렇게 생활하던 그에게 한국에서 선배 한 명이 찾아와 양말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는 “선배에게 ‘저는 양말에 양짜도 모릅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이제 50인데 업종을 변경하려니깐 좀 그렇습니다’라고 했더니 선배는 ‘옷이나 양말이나 그게 그거야’라고 하더라”며 “그때의 그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고 회고했다.


그는 처음 양말 1만2000켤레를 주문받았다. 그는 무리 없이 중국 공장에 하청을 주고 양말을 생산해 독일에 팔았다. 그랬더니 다음번엔 3만6000켤레가 주문됐다. 그는 그렇게 6개월만에 100만달러를 수출했다.


양말을 주문받아 생산하던 그는 2001년 자신의 양말공장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는 저장성 주지시 양말단지에 정식 외자기업인 주지유진침직유한공사를 설립해 2000평 규모의 양말 공장을 세웠다.


그가 생산한 양말은 미국 월마트와 한국 이마트를 비롯해 독일, 일본 등 전 세계로 수출됐다. 그의 회사는 직원이 500명에 이르고 연간 수출이 1000만달러를 넘어서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는 성공신화를 쓰기까지 ‘하면 된다’는 신념을 몸소 실천했다. 한번은 캐나다로 수출됐던 양말 상표가 잘못돼 컨테이너 7개, 무려 105만 켤레가 되돌아 왔고, 일주일 안에 고쳐 보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전 직원은 물론 주변 공장도 동원됐지만 대안이 되지 못했다. 그때 생각해 낸 곳이 바로 교도소다. 곧바로 교도소장을 만나 협상했고, 수감자들을 활용해 일주일만에 문제를 해결한 일은 그의 뚝심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그는 “30년 전으로 필름을 거꾸로 돌리면 우리도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 중국은 우리가 발전한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성장하고 있다”며 “중국에 왔으면 중국법을 지켜야 하고 중국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을 파악해서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도전을 찾아서=승승장구하던 그의 양말사업은 중국의 변화 속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중국 하청공장들이 성장하면서 경쟁력 확보가 힘들어졌고 인건비가 상승하는 등 여러 가지 환경이 나빠졌다.


그는 사업 규모를 점점 축소했고, 2008년 말 공장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가 새롭게 바라본 지역은 바로 남미 멕시코였다. 그는 2009년 이우시에 유진무역유한공사를 설립해 양말과 의류를 주문 생산하는 무역업에 나섰다.


그러던 그는 멕시코의 시장성을 확인하고 2012년 여성 레깅스 7만장을 싣고 멕시코로 향했다. 그는 보름 만에 가지고간 상품을 모두 판매해 또 한 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멕시코시티 시장에 도소매 매장과 창고를 설립하고 중국에서 생산된 여성 의류와 양말을 판매하고 있다. 그는 멕시코에 여성의류인 ‘바소미(BASOMI)’와 양말인 ‘엠파드(Empard)’를 공식 상표 등록했다.


멕시코 시장의 후발 주자인 그는 가격은 같지만 품질은 좋게 한다는 전략으로 시장을 공략했다. 그 전략은 성공했고, 상품의 인지도도 높아지고 있다.


그는 “지금은 멕시코에 집중하고 있다. 멕시코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이곳을 바탕으로 다른 지역에 진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가 새롭게 바라보고 있는 지역은 쿠바다.


▲고향과 함께한 삶=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을 잊은 적이 없다.


그는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고향 선후배들의 축구 동호회였던 ‘한라축구회’에서 활동했다. 그 인연으로 서울도민회에도 참여하게 됐다.


그는 1996년부터 10년 동안 서울제주도민회 체육이사 겸 제주도민의날 행사위원장을 맡아 서울도민회 체육대회를 처음 열게 됐다. 그 체육대회가 매년 10월 서울에서 성대하게 열리는 서울제주도민의날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한국에 올 시기가 맞으면 도민의 날을 찾는다.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잊어져도 상관없다”며 “도민들이 많이 모이고 활성화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도 고향 사랑은 계속됐다. 그는 2007년과 2008년 제6대 중국 이우한인회장, 전 중국 한국인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09년부터는 민주평통자문위원과 제주도해외통상자문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 2011년에는 제8대 이우한인회장으로 선출돼 2년 동안 한인회를 다시 이끌었고, 현재는 한인회 고문을 맡고 있다.


특히 그는 중국에 진출하자마자 고향 후배들과 함께 중국 제주도민회를 꾸리고, 2007년에는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해외에서 사업을 하려면 모르는 부분이 많다. 그런 부분을 조언하고 서로 도와야 한다”며 “특히 제주도 후배들을 많이 도와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최근 가장 많은 신경을 쓰는 부분은 제주와 이우시의 교류 확대, 그리고 제주상품관과 홍보관의 활성화다. 제주도통상자문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제주도 상품이 중국의 내수 시장을 뚫어야 하고 그 거점으로 이우가 제격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우가 바로 전 세계의 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10월 이우시 푸톈시장에 제주상품관 설립을 주도했다. 제주도와 이우시를 연결하고 중국 현지 사업자가 제주상품관을 직접 운영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그는 “이우시에 제주 상품의 근거지를 만들고 프랜차이즈 형식으로 중국의 다른 도시로 진출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제주 상품이 중국 전역으로 뻗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제주와 이우의 교류 확대의 필요성을 주문했다. 그는 “이우는 세계의 상품과 상인들이 모이는 곳이다. 서로 접목해서 발전했으면 한다”며 “그것이 제가 고향에 마지막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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