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방직기계 1대서 출발...연매출 3억엔 이상 음식점 4곳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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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을 최고로 모시고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성공 원동력"
   
이대호 칸아이 주식회사 대표(사진왼쪽)와 이 대표가 운영하는 사이타마현 이온 레이크타운 내에 푸드코트 내 한국 가정요리 음식점 전경.

▲가난이 싫었던 청년, 밀항을 하다=이대호 칸아이 주식회사 대표(66)는 1949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계초등학교와 대정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 병장으로 만기 전역하는 등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처럼 평범했던 이 대표의 삶은 사업 실패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난관을 맞게 된다. 군 제대 후인 1972년 이 대표는 아버지와 형의 도움을 받아 제주시 보성시장에서 식료품 도매상을 시작했지만 경영악화로 인해 자본금 70만원을 모두 날려버렸다.

 

또 평생의 든든한 기둥과 같았던 아버지마저 같은 해 돌아가시고 만 것이다. 이에 가난의 구렁텅이로 빠진 이 대표는 스물세 살이란 나이에 일본으로의 밀항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밀항도 쉽지 않았다.
이 대표는 밀항을 위해 브로커를 통해 부산에 있는 한 건물에서 한 달 정도 기다렸다가 일본행 무역선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 오사카에 도착했다.

 

 

   
이대호 대표가 운영하는 한국 가정요리 음식점에 손님들이 찾아 음식을 주문하는 모습(사진위) 도쿄 분쿄쿠에 위치한 재일본관동제주도민협회 외부 전경(사진아래)

▲불법 체류자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다=우여곡절 끝에 일본 오사카에 도착한 이 대표는 밀항 시 알선료인 당시 한화 20만원을 갚기 위해 휴일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복 다리는 일과 플라스틱 그릇 제작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일을 했고, 끼니를 거르는 날은 다반사였다.

 

이 대표가 밀항했을 때 선불금 20만원을 연 4%의 고리로 빌렸기 때문에 이를 빨리 갚지 않으면 고향 제주에 있는 가족들이 어려움에 봉착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령과 대령의 월급 6000원에서 8000원이었던 점으로 볼 때 20만원은 상당한 금액이었다.

 

이 같은 생활을 4년 여간 이어온 후 이 대표는 오사카 소재 한 방직 공장으로 이직했고, 여기에서 제주시 도두동 출신인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결혼 후 이 대표는 방직 공장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방직기계 한 개를 사서 1인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새로 시작한 가방 사업은 평소에 고객을 최고로 모시고,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 대표의 철학이 그대로 반영되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일본에 온 지 10년 만에 그나마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새로운 도전과 꿈에 그리던 영주권 획득=이 대표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일본 도쿄로의 진출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다. 가정을 꾸렸고, 자식 두 명을 잘 키우기 위해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한 것이었다.
도쿄에 온 이 대표는 당장 주택을 짓고 공장을 건립할 자금이 필요했지만 일본 은행들은 영주권도 없는 한국인에게 대출을 해주지 않았다.

 

다행히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일본인 건설회사 사장이 주택과 공장을 지어주면서 은행에 보증까지 서주면서 당시 3000만엔을 융자받을 수 있었다.

 

이에 이 대표는 가방 공장을 통해 융자금을 갚고, 또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면서 생활할 수 있었다.

 

이 같은 평온함도 잠시 1983년 자식들이 초등학교에 가야 될 시기가 되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영주권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 입학 시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에 이 대표는 일본 정부에 영주권을 공식적으로 신청하는 과감한 도전을 하게 된다.

 

하늘도 이 대표의 노력에 감명했을까, 당시 한 해 7명 정도에게만 주어졌던 일본 영주권을 이 대표가 받게 된 것이다.

 

▲새 사업 개척과 사업의 안정화=이 대표의 가방 공장 사업이 안정화를 맞이하고 있을 때이던 2000년 초반 일본 정부는 갑자기 불법 체류 외국인에 대한 단속을 강화한다.

 

영주권이 없는 종업원을 채용한 업체가 적발될 경우 그 업주까지 처벌한다는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이 때문에 종업원 대부분이 제주출신 등 영주권이 없는 한국인들이었던 이 대표의 가방 공장은 운영에 어려움이 닥쳤다.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이 대표는 한국 가정요리 음식점 사업으로 진출하게 됐다. 이는 겨울연가와 대장금 등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는 등 한류 열풍이 일본에 몰아친 호기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 가정요리 음식점 사업에 뛰어든 뒤에도 고객을 최고로 모시고,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 대표의 철학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다양한 한국 요리를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게 만들면서 일본인 손님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다양한 노력을 통해 이 대표는 현재 일본 도쿄와 사이타마현 고시카야시 이온 레이크타운 등지에 한국 가정요리 음식점 4곳을 운영하면서 3억엔 이상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다.

 

▲고향과 조국을 위한 봉사활동에 헌신=이 대표는 어렵고 힘든 삶 속에서도 고향에 제주와 대한민국을 위한 봉사에 헌신적으로 앞장섰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도쿄본부 산하 아다치지부 납세조합 부회장,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민단 아다찌지부 의장,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민단 아다치지부 단장을 역임하면서 일본 도교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권리와 복지 증진에 앞장섰다.

 

특히 이 대표는 민단 아다찌지부 단장을 역임하면서 고령인 재일교포 1세들의 휴양을 위해 목욕과 식사, 오락시설 등을 갖춘 데이서비스센터를 개소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처럼 민단에서 다양하게 활약하던 이 대표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고향 발전을 위해 직접 나섰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재일본 관동제주도민협회 조직부장,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부회장, 2012년부터 2013년까지 회장을 역임한 데 이어 현재 재일본 관동제주도민협회 상임 고문을 맡고 있다. 이 대표는 이 같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탐라문화제와 도민체전 등의 행사 참여를 위해 매년 5, 6회씩 고향 제주를 방문하고 있다.

 

이 대표는 “일본에 와서 20년간은 휴일과 주말도 없이 일만 하다 보니 민단이 뭔지도 몰랐다. 하지만 민단과 재일본 관동도민협회를 알게 된 이후에는 고향과 고국을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에 참여했다”며 “앞으로도 고향과 고국, 그리고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의 권리와 복리 증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고향 제주를 말하다=이 대표는 앞으로 고향 제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대표는 “1970·1980년대에도 제주의 자연경관은 너무나 좋았지만 관광객이 찾아오지를 않았다. 이는 접근성이 떨어지고 자연경관 외에 관광객들에게 필요한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개발을 해야만 관광객을 더 유치할 수 있을 것이고, 제주도의 인구도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 대표는 과거 고향 제주의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수많은 노력을 한 재일교포들에 대해 이제는 제주도가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고도 당부했다.

 

이 대표는 “과거 재일교포들은 제주에 호텔이 없다고 해서 호텔을 지어주고, 컨벤션센터가 필요하다고 해서 투자를 하고, 여기에 각종 기본 인프라를 조성해야 한다고 해서 지원을 했다. 고향에 대한 애향심이 깊었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제주도가 수년 전부터 재일교포들에게 필요한 점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놓고 아무런 후속조치도 없는 데 이 같은 정책들이 조사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uni@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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