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대~한민국' 함성 속에 제주 미래 향해 첫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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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국제자유도시호 출범, 월드컵 개최, 4.3 희생자 첫 인정

‘대~한민국’의 함성과 열기 속에 2002년은 제주의 미래 비전으로 선택한 제주국제자유도시가 본격 추진되면서 새로운 제주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딘 해였다.


또한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 가운데 하나인 4·3사건 희생자를 정부가 처음 공식 인정해 제주도민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물꼬가 트이기도 했다


특히 붉은 악마의 거리 응원이 온 섬을 출렁이게 하고, 전국체육대회가 두 번째로 제주에서 열리는 등 스포츠를 통해서도 하나가 된 해로 기록됐다.


▲제주국제자유도시 출범=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이 2002년 4월 1일 발효되면서 제주국제자유도시호(號)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제주를 사람과 상품·자본의 이동이 자유롭고 기업 활동의 편의가 보장되는 동북아 중심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한 법적 효력이 발생한 것이다.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의 시행은 21세기 동북아의 거점도시로 도약하는 제주 미래의 청사진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신호탄으로 도민들은 받아 들였다.


5월 15일에는 제주국제자유도시 전담 조직으로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서울 삼성동에서 창립식을 갖고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갔다.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는 국제자유도시 시행 계획 수립 및 집행, 7대 선도 프로젝트 추진, 투자 유치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이와 함께 12월에는 제주국제자유도시의 첫 결실로 볼 수 있는 내국인면세점이 제주국제공항 국내선 출발 대합실에서 개장식을 갖고 운영에 들어갔다.


제주국제자유도시 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설립된 JDC면세점은 13년 동안 7800억원의 수익을 올려 핵심 프로젝트에 전액 투자하는 등 국제자유도시 조성과 지역사회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한·일 월드컵 제주 개최=2002년 6월 월드컵의 뜨거운 감동이 온 섬을 출렁이게 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를 받은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한·일 월드컵 대회 우승팀 브라질과 중국과의 예선전, 파라과이와 슬로베니아 예선전, 독일과 파라과이의 16강전 등 3경기가 펼쳐졌다.


월드컵 기간 제주월드컵경기장을 비롯해 제주종합경기장, 제주시 탑동광장 등은 ‘붉은 물결’로 넘실거렸다.


전국을 뒤덮은 ‘붉은 물결’과 ‘대~한민국’의 구호 속에 한국은 사상 처음 월드컵 16강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거둔 여세를 몰아 전 세계 축구팬들을 깜짝 놀라게 한 ‘4강 신화’를 완성했다.


월드컵 대회에 앞서 서귀포월드컵 경기장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개장 기념 경기와 한국-잉글랜드의 평가전이 열렸는데 특히 한국와 잉글랜드 평가전에는 4만여 명이 관중이 경기장을 가득 메워 월드컵 성공 개최를 일찌감치 예감하게 했다.


▲전국체전 성공 개최=제83회 전국체육대회가 그해 11월 9일부터 15일까지 제주에서 사상 두 번째로 개최됐다.


‘푸른꿈 힘찬기상 한라에서 세계로’라는 대회 구호 아래 펼쳐진 대회에서 제주 선수단은 1998년에 이어 4년 만에 성취상 1위를 차지했다.


제주 선발팀은 폐막식에 앞서 열린 축구 남고부 결승에서 우승해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전국체전 사상 처음으로 한라산 백록담에서 채화된 성화는 러시아와 제주의 소녀들에 의해 점화돼 감동을 선사했다.


전국체전 성화는 원래 강원도 마니산에서 채화됐지만 경기도 강화지역에 돼지콜레라가 발생함에 따라 채화 장소를 한라산으로 변경했는데, 성화는 눈 쌓인 백록담에서 태양열로 채화됐다.


▲4·3희생자 첫 결정=정부가 제주4·3사건 발생 54년 만에 처음으로 제주4·3사건 희생자를 공식 인정했다.

11월 20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김석수 국무총리)는 4·3때 희생된 도민 가운데 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한 1801명에 대한 희생자 지정 여부를 논의했다.


그 결과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86명에 대해서는 심의를 유보하고, 나머지 1715명 전원을 4·3희생자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 가운데 하나인 4·3의 와중에 억울하게 희생당하고도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반세기 동안 한을 품어야 했던 희생자와 유족을 포함한 제주도민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물꼬가 트였다.


그러나 군법재판을 받아 형무소에서 숨진 수형인들이 희생자 결정대상으로 회의에 상정조차 안 돼 4·3의 완전 해결까지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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