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자원본부의 석고대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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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편전 앞에 하얀 소복 차림의 세자가 짚으로 만든 거적에 앉아 있다. 세자는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연신 바닥에 머리를 찧는다. 그러면서 “아바마마, 소자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외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자의 석고대죄(席藁待罪) 장면이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서 석고대죄를 가장 많이 한 세자는 누구일까. 아마 비운의 인물로 알려진 사도세자일 게다. 기록된 것만 30회를 넘는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영조가 차마 수행하지 못할 전교를 내릴 때마다 관(冠)을 벗고 석고대죄를 해야만 했다.

석고대죄는 세자만 하는 게 아니다. 신하들도 했다. 예컨대 ‘선위 파동’이 일어나면 세자와 신하들은 임금을 향해 엎드려 절하며 선위를 거둬달라고 읍소한다. 밤을 새는 건 예사고, 때론 며칠씩 가기도 한다. 예외적이긴 하지만 임금도 석고대죄를 했다. 가뭄 등 재해가 닥쳤을 때 하늘로부터 죄를 청하는 기우제가 바로 그것이다.

▲석고대죄는 거적을 깔고 엎드려서 임금의 처분이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사전적 의미다. 임금이 왕권을 확고히 하거나 세자나 신하들의 충성도를 시험하는 잣대로 이용되곤 한다. 역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석고대죄는 오늘날에도 빈번히 이뤄지고 있다. 아니 그 쓰임새가 더욱 활발하다. 사회 곳곳에서 애용되고 있는 게다. 주로 매우 큰 잘못을 저지른 집단이나 사람 등이 행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다며 국민이나 다수의 사람 앞에 용서를 구하는 형식이다.

한데 진정성이 없거나 부족하면 그 의미가 퇴색되거나 반감된다. 나아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일종의 ‘쇼 또는 술수’로 비춰진다. 정치판에선 정략적인 도구로 활용된다.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잘못했거나 약점을 보이면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라”며 공격한다.

▲얼마 전 도내에선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상하수도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제주특별자치도 수자원본부가 기자회견을 자처해 자신들의 잘못을 이실직고 한 것이다. 내용인 즉슨, 상수도 유수율과 누수율을 지속적으로 조작해 왔고, 수년간 그 사실을 은폐해 왔다는 거다.

그래 놓고는 “도민들께 석고대죄하는 하는 심정으로 사과한다”며 머리를 숙였다. 한데 그걸로 끝이다. 물론 수자원 행정을 전면적으로 혁신하겠다고는 했다. 도민들을 기만해온 행위치곤 너무 가벼운 반성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석고대죄 말 한마디로 면죄부를 받으려는 심산은 아닌지 모르겠다.

고경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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