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가장 제주다운 절집들을 만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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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성지순례길-보시의 길(上)
   
제주시 외도동에 있는 월대천은 소나무와 팽나무가 무성한 가운데 연중 맑은 물이 흘러 주민들의 쉼터로 각광을 받고 있다.

지난해 11월 개통한 ‘보시의 길’은 제주시 애월읍부터 삼양동까지 전체 구간이 45㎞에 달한다. 이 길은 가장 제주다운 절집들을 연결하고 있으며, 제주불교가 민초들의 삶에 파고든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본지는 두 차례에 걸쳐 보시의 길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보시(布施)란 널리 베푼다는 뜻으로 자비의 마음을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을 말한다.

보시의 길은 애월읍 수산봉(해발 122m) 밑 수산저수지에서 시작된다. 저수지에는 400년 동안 모진 풍파 속에서 곰솔이 꿋꿋이 버텨 내면서 보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수산봉 기슭에는 1933년 청산 스님이 창건한 대원정사가 있다. 1948년 4·3당시 수산봉에서는 토벌대와 무장대간 치열한 전투가 치러졌다.

무장대에 입산한 스님을 절간에 숨겨줬다는 이유로 당시 주지였던 고정선 스님은 총살당했고, 사찰이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다.

질곡의 시간을 지난 대원정사는 1961년 제주 법화종의 발상지가 됐고, 부처님의 자비를 널리 알리고 있다.

수산봉을 지나면 대몽 항쟁의 상징인 항파두리성이 나온다. 3년 여 동안 이어온 삼별초의 항쟁은 1273년 1만2000여 명의 여·원 연합군의 공격으로 제주에서 종식됐다.

고려가 불교국가였던 만큼 삼별초군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부처님에게 의지했을 것이다.

항파두리성과 마주해 있는 극락오름(313m)은 삼별초군이 무술을 익혔던 곳으로 ‘살 맞은 돌’은 과녁으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극락오름 서쪽 자락에는 1928년 변덕립 스님이 창건한 극락사가 있다. 이 사찰 역시 4·3의 전운으로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다가 1953년 재건됐다.

극락사 입구 모퉁이에는 삼별초군의 소중한 식수원이었던 ‘구시물’이 있다. 구시물은 샘 모양이 소구시(여물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졌다.

삼별초군은 토성 밖에 있는 이 식수원을 보호하기 위해 외성(外城)을 쌓았다.

고려시대에는 제주불교가 흥했는데 영실 존자암은 국성재(國聖齋)를 봉행해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

또 산남의 법화사와 산북의 수정사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해당 지역의 사찰들을 관리하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이 됐다.

비보사찰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커다란 다툼이 일어날 곳에 미리 절을 지어 땅기운을 다스리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살기가 편한 ‘국태민안’을 염원하기 위해 세워졌다.

비보사찰인 수정사를 근간으로 애월읍에는 무주선원, 백제사, 법장사, 향림사, 혜능사, 우리절, 월령사, 성광사 등 많은 절이 들어서 있다.

가장 제주다운 절집과 절집을 연결하는 보시의 길을 따라 애월읍 광령3리에 접어들면 광령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는 1930년대 논농사를 목적으로 일신학교(현 구엄교) 설립자 백창유 선생이(1889~1948)이 일본인 자본가와 함께 광령~해안~외도~하귀에 이르는 수로를 건설해 만든 저수지다.

1953년 제주농지개량조합(현 농업기반공사)이 재 착공해 현재의 위용을 갖췄다.

애월읍을 벗어나 외도동에 들어서면 하천을 따라 수령이 200년이 넘은 소나무와 팽나무가 무성한 월대천이 나온다.

연중 물이 흘러 시원한 월대천은 신선이 물가에 비친 달그림자와 노닐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묵객들도 술잔에 달그림자를 집어넣어 풍류를 읊었다고 한다.

외도동에는 앞서 언급했던 대형사찰인 수정사가 있었다. 옛 문헌에는 수정사가 고려 충렬왕 26년인 1300년에 원나라 황후의 명에 따라 세워진 사찰이라고 기록됐다.

지금은 수정사 터 주변으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옛 명성은 찾아 볼 수 없고 표지판에 흔적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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