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이슬, 백로(白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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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 지나고 9월로 들어서자 무더위가 꼬리를 내렸다. 철든 며느리가 고개를 숙이듯 한결 순해진 날씨다. 아침 저녁으론 선선한 바람이 불고, 밤에 잘 때는 창문을 닫아야 할 만큼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간사하다. 벌써부터 춥네 어쩌네 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해도 왜 이렇게 덥냐며 아우성을 치던 우리였다.

하기야 가을 전령인 처서와 추분 사이에 낀 백로(白露)가 오늘(8일)이다. 말 그대로 흰 이슬이 맺히는 시기를 맞았으니, 온도에 민감한 사람들은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24절기 중 15번째인 백로는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했다. 가을 기운이 완연해지는 시기다.

우리 조상들은 이때가 되면 잡초의 성장이 멈추게 된다고 해서 너나 없이 벌초에 나섰다. 이미 벌초를 끝낸 사람들도 많겠지만, 음력 8월 초하루를 앞둔 이번 주말이 절정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옛 중국 사람들은 백로에서 추분까지의 시기를 5일 간격으로 삼후(三候)로 나눴다고 한다. 초후엔 기러기가 날아들고, 중후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말후에는 뭇 새들이 먹이를 저장하는 시기다.

▲이 계절에 문득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란 시가 떠오른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라고 했다. 조그만 대추 하나가 익기 위해서도 지난(至難)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어디 대추뿐이겠나. 이 가을 볕을 머금어 영글고 있는 산과 들의 온갖 곡식과 과일들이 다 그렇다. 어느 하나 예사롭게 피어난 게 없다. 때론 지독한 가뭄에 견뎌야 했고, 천둥과 먹구름 속에서 울고, 그리고 뜨거운 햇살 아래서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농부의 굵은 땀방울이 거기에 더해졌음은 물론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결실의 계절에 누구라도 한 번쯤 음미해 볼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이치를 너무나도 쉽게 망각하고 있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부가 쌓일수록, 윗사람이 될수록, 권력이 커질수록 목소리를 높이고 고개를 빳빳이 쳐든다.

권력과 돈을 무기 삼아 남을 얕잡는 갑질 횡포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나타나는 갈등과 대립의 골은 자기 우월을 과시하는 그런 같잖은 행태 때문이 아닐까.

세상사 기고만장할 일이 아니다. 권력이라는 게 어느 한 순간 사라지기 마련이다. 아침의 흰 이슬처럼.

오택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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