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산남지역 최초 설립 복음의 씨앗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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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논성당길...신축교안 등 굴곡의 역사 속 천주교 전파
   
서귀포 최초의 성당인 하논성당을 이어 받아 1937년 문을 연 서귀포성당은 산남지역의 모태 성당으로 자리매김했다.


2013년 개장한 하논성당길(10.6㎞)은 115년 전 산남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가톨릭)를 전파, 신앙의 모태가 된 ‘하논성당’을 중심으로 순례길이 펼쳐진다.

제8대 천주교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프랑스 선교사 페네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 신부를 제주에 파견, 1899년 제주본당(현 중앙성당)을 설립했다.

이듬해인 1900년 김 신부는 서귀포 최초의 성당인 하논성당을 호근동에 세워 초대 신부가 됐다.

김 신부는 회충약과 말라리아약인 ‘키니네’를 받으러 오는 도민들이 많음에 따라 “육신에 좋은 약만 청할 게 아니라 마음에 좋은 약도 구해야 된다”고 설교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비록 초가성당이었지만 신자 137명에 예비신자는 620명까지 늘었다.

김 신부가 집필한 46장 분량의 ‘수신영약(修身靈藥)’은 구한말 가톨릭과 토착신앙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1895년부터 10년간 전국에서는 천주교도와 비신앙인들 사이에서 300여 건의 교안(敎案:종교적 충돌)이 일어났는데 그 중 가장 큰 교안은 1901년 제주에서 발생한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으로 700여 명의 천주교인이 몰살당했다.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면서 제주천주교는 큰 시련을 맞이했다. 하논성당 역시 복음을 전파하던 신입 교우들이 순교하거나 희생당했다.

당시 사제회의로 서울에 머물던 김 신부는 다시는 제주에 돌아오지 못하고 타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1936년 선종했다.

하논성당은 2대 무세 신부에 이어 3대 타케 신부가 부임했다. 하지만 이재수의 난으로 신자는 35명으로 줄고 건물은 폐허가 되면서 1902년 서홍동 홍로성당으로 이전했다.

홍로성당 출신인 고군삼 베네딕도는 1929년 제주 출신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됐다.

고 신부는 거제·통영·김천성당에 부임했으나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사제직을 환속당해 성무활동이 정지됐다.

사제에서 평민이 된 그는 말년에 강원도 정선 일대를 배회하며 교회의 마당을 쓸어주는 등 운둔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로성당은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라이언 신부가 10대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새 전기를 맞이했다.

그는 서귀동으로 신앙 터를 옮겨 목조 함석집과 초가집을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해 1937년 ‘서귀포성당’ 시대를 열었다.

아일랜드 출신인 라이언 신부(1907~1971)는 “700년의 투쟁을 통해 아일랜드가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했다”며 신자들에게 독립심과 저항정신을 고취시켰다가 일제에 의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99년 건국훈장을 전수받은 라이언 신부는 애국지사 반열에 올랐다.

서귀포성당은 모슬포·성산포·서귀복자·중문·효돈 성당으로 교세를 확장시키는 등 산남지역의 모태 성당으로 자리매김했다.

‘김대건길’에 이어 천주교 제주교구와 제주관광공사가 두 번째로 개장한 ‘하논성당길’은 서귀포성당에서 시작해 천지연 산책로, 하논성당 터, 솜반내, 흙담소나무길, 후박나무 가로수길, 지장샘, 면형의 집, 서귀복자성당을 거쳐 다시 서귀포성당으로 돌아오는 원형 코스로 이뤄졌다.

천지연폭포의 젖줄인 솜반내를 비롯해 하논분화구, 지장샘 등은 순례자들에게 빼어난 절경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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