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충절의 상징, 연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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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초 구하러 온 전설 깃들여
   

바다를 통한 제주의 대표적인 관문은 현재 제주항이다.

 

그러나 과거 현재의 항공기나 현대식 선박이 없던 시절, 내륙을 왕래하는 제주의 관문은 조천포구와 화북포구였다.

 

조선시대 제주에는 몇 곳에 중앙이나 지방관리들이 공무로 출장을 다닐 때 머물며 숙식하던 관아 건물이 있었는데 특히 조천은 육지를 오가는 배가 출항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어 조천관(朝天館)이 세워졌었다.

 

현재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포구에는 넓은 성곽과 높은 성루가 있고, 그 위에 아름다운 정자가 하나 있는데 바로 1971년 8월 유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연북정(戀北亭)이 자리 잡고 있다.

 

연북정은 원래 조천진성 바깥에 있는 객사(客舍)로서 처음 축조한 연대는 알 수 없다.

 

1590년(선조 23) 절제사 이옥(李沃)이 조천진성을 동북쪽으로 돌려 쌓은 다음에 그 위에 옮겨 세워서 ‘쌍벽정(雙碧亭)’이라고 했다.

 

‘쌍벽’은 청산도 푸르고 녹수도 푸르러서 쌍쌍이 푸르다는 뜻으로 제주도의 아름다운 절경을 이름에 담았다.

 

이후 1599년(선조 32)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이 건물을 보수하고 연북정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연북(戀北)’은 북쪽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북쪽에 있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충정을 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천진성과 연북정이 위치한 조천포구는 진시황을 명을 받고 불로초를 찾으러 제주로 온 서불과, 조천석(朝天石)이라는 돌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서복이 도착한 조천포구 이 세상에는 신선이 살고 있는 산이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세 곳인데 이 중 영주산이 바로 한라산이다.

 

서복은 진시황의 불로불사의 약을 찾기 위해 곤륜산에서 천년된 나무로 배를 만들고 동남동녀 500명과 함께 영주산을 찾아 나섰다.

 

드디어 서복은 망망대해를 건너 영주땅의 금당포(金塘浦·지금의 조천포구)에 도착해 하늘에 감사의 제를 지냈다.

 

그리고 큰 바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는 뜻의 ‘조천(朝天)’이라고 새겼으며 그 때부터 이 곳의 지명이 조천이라고 불렸다는 전해지고 있다.

 

조천포구에 도착한 서복은 한라산에 올라 불로초인 시로미를 따고 배를 타서 섬을 돌아보다 서귀포 정방폭포앞에서 배를 멈춘 후 폭포의 절경을 감상하며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을 벽에 새겨 놓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래서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이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천석 조천관은 부산, 인천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관(三館) 중 하나로 제주목(濟州牧)의 출입 항구 였다.

 

이 선창가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것이 조천석으로 조천관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포구 이용자들은 이 바위에다 닻줄을 메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에서 유명한 지관이 와서 이 바위를 보고는 “저 바위를 보이지 않게 감추시오. 만일 감추지 않으면 조천에는 불량한 사람이 많이 나서 마을 사람들을 못살게 굴 것이오” 이어 이 지관은 저 바위를 감추면 조천지역에서 훌륭한 인물이 끊이지 않고 배출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관아에서는 관내 마을주민들을 동원해 성을 쌓으면서 조천석을 메워 흙을 높이 쌓아 올렸다.

 

그리고 정자를 지어 쌍벽정이라고 칭했으며 그 후부터 조천지역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고 한다.

 

또 다른 조천석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연북정 자리는 원래 바다였으며 조천석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흙과 돌로 조천석 및 바다를 메워 연북정이 지어졌다.

 

정자를 지은 지 얼마 후 한 지관(地官) 이곳을 찾아 “저쪽에 바위가 하나 있을 터인데, 이상하다”라고 하자 주민들은 “조천석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그 것을 메우고 정자를 지었지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지관은 “그러면 그렇지, 칠성(七星)의 마지막별이 저기 가서 떨어진 것이요”라고 답했다.

 

지관은 일곱 개의 별이 함덕부터 조천까지 떨어져 바위가 됐는데 마지막 별자리에 정기가 모여 있어 연북정같은 정자를 짓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설명했다.

 

제주의 관문이었던 조천진과 연북정에는 중앙 및 지방관료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이용했다.

 

관료들에게 연북정은 임금에게 충정을 나타내고 ‘언제면 나를 중앙으로 불러줄까’라며 임금을 사모하는 곳이겠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배가 육지로 나가기 위해 순풍이 불기만 기다리는 곳일 뿐이었을 것이다. 조문욱 기자 mwcho@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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