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황사영 백서 사건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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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물론 정약용도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
   
▲ 지난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기념해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황사영 백서 원본.
황사영 백서는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중국 베이징교구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 보고와 그 대책을 적어 보내려다 체포되면서 전하지 못한 밀서(密書)다.

흰 비단(가로 62㎝·세로 38㎝)에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부른다.

황사영은 17세이던 1791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신동으로 처가의 영향으로 천주교인이 됐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의 ‘배론’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로 피신, 토굴에 숨어서 자기가 겪은 박해상을 기록했다.

도합 1만3311자를 검은 먹 글씨로 깨알같이 쓴 백서에는 신앙의 자유와 조선 천주교 보호를 위해 서양 군함과 군대를 개입시키자는 제안까지 해 관헌을 아연실색케 했다.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이미 경상도로 유배를 갔던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전남 강진으로 다시 유배돼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조선교구장인 뮈텔이 1925년 한국 순교복자 79위 시복식 때 교황 피우스 11세에게 전달하면서 원본은 로마 교황청 바티칸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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