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천주교인 희생과 교회 수난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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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천주교 성지순례길-신축화해길
신축화해길은 제주시 화북동 천주교 황사평성지에서 출발해 화북포구~별도봉~김만덕 묘비~관덕정~향사당~중앙성당까지 10.8㎞에 이른다.

순례길은 천주교인들의 희생과 교회 수난의 고통을 넘어 화합과 상생을 지향하고 있다.

1887년 한불수교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났지만 전국에서는 천주교인과 비신앙인들 사이에 300여 건의 교안(敎案:종교적 충돌)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큰 교안이 1901년 제주에서 발생한 신축교안(이재수의 난)이다.

평안도 출신이자 봉세관(封稅官)으로 제주에 부임한 강봉헌은 온갖 잡세를 징수했고, 이런 일에 천주교인들을 채용했다.

여기에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았던 프랑스 신부들을 등에 업은 일부 천주교인들은 폭행과 약탈 등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

또 교회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을 없애면서 도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01년 2월 대정읍 인성리에서 천주교를 배척하던 오신락이 교회당에서 매를 맞은 후 죽음에 이르렀다.

이에 맞서 채구석 대정군수가 조직한 비밀결사 ‘상무사’는 봉세관과 결탁해 백성을 괴롭히는 천주교인들의 횡포를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대정읍에서 열면서 무장 봉기를 촉발하게 됐다.

관노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은 무장을 한 후 서진과 동진으로 나눠 제주성으로 향했다. 제주성에 입성한 주장(主將) 이재수는 관덕정에 올라서서 숨어있던 천주교인들을 색출해 죽일 것을 지시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에 따르면 물고자(物故者:사망자)는 교인 308명, 평민 8명 등 모두 316명(남 304명·여 12명)으로 무고한 교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이 확대되자 프랑스 신부의 요청으로 프랑스 군함 2척이 그해 5월 말 제주에 도착했다. 군함에 승선한 홍순명이 지휘하는 정부군 수 백 명도 배에서 내렸다.

제주에 급파된 찰리사 황기연은 세금과 교회의 폐단에 대해 시정을 명한 고종황제의 방문을 붙여 민군을 해산시켰다.

민란의 우두리머인 이재수·강우백·오대현 3명은 자수를 했지만 교수형에 처해졌다.

많은 천주교인들은 관덕정에서 피살된 후 시신은 별도봉 기슭에 버려지듯 묻혔다.

1903년 홍종수 제주목사와 프랑스인 라크루 신부와의 접촉으로 그해 4월 황사평에 이장을 했다.

6만㎡ 면적의 황사평성지는 신축교안 당시 희생자를 매장한 이후 지금은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공동 안장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재수의 난에 대해 ‘제주민란’과 ‘신축교안’이라는 용어가 함께 불린 이유는 세금 징수에 따른 학정과 천주교회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봉기였다는 견해와 수 백명의 무고한 천주교인들이 피살돼 교회가 수난(박해)을 입었다는 시각 차 때문이다.

2003년 천주교 제주교구와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는 ‘미래 선언’을 채택,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고 제주 공동체를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가자고 다짐했다.

천주교 측은 제국주의 시대에 선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잘못에 대해 반성했고, 기념사업회는 봉건왕조의 압제와 외세 침탈에 맞서 항쟁하던 중 많은 천주교인이 살상한 데 대해 사과했다.

순례길은 황사평을 시점으로 조선시대 제1의 관문이던 화북포구, 희생자들이 가매장됐던 별도봉에 이어 관덕정과 향사당, 중앙성당 등 100여 년 전 천주교회가 겪은 수난과 희생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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