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北 최남단 마을과 800m 두고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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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분단의 현장을 가다-대성동 마을
2007 남북정상회담이 지난 2일부터 2박3일간 평양에서 열렸다. 이번 회담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남북이 독자적인 정부를 각각 수립한 이후 53년만에 만나 남북교류와 화해협력의 물꼬를 튼 지 7년여만의 일이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육로로 북한을 방문했고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음으로써 한반도가 더 이상 남분분단의 냉전지대가 아니라 이제 평화와 교류협력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선언했다.제주일보는 창간 62주년을 맞아 남과 북이 최북단에서 맞닿은 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후 54년간 최고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유엔사와 북측의 공동경비구역인 판문점과 비무장지대 유일한 마을인 대성동 자유의 마을을 현장 취재했다. 제주출신 김영규(60)유엔사(한미연합사, 주한미군) 공보관과 JSA 케이츠 안내장교와 동행한 이번 취재는 제주일보 창간사상 처음으로 이뤄진 일이다.

남한 최북단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유일한 마을이다.

북측 최남단 마을인 기정동 선전마을과 불과 800미터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다.

행정 구역상으로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이다.

대성동 마을회관 옥상에서 11시 방향으로 보면 개성공단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특히, 마을 북동쪽으로 약 1km 지점에 판문점이 위치하고 있고, 마을로부터 4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있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다.

또 이곳에서는 마을 정면에 위치해 있는 북한의 기정동 마을(일명 “선전마을”)과 개성공단 공사현장, 그리고 북한군 초소와 군인들을 육안으로 관측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북과 맞닿은 최접경 지역이다. 그러나 북측에 높이 솟아 있는 인공기와 남측의 태극기만 없었더라면 남북측 마을이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같은 하늘과 땅, 같은 산과 강을 나누고 있었다.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 철탑의 높이는 160m,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 철탑은 100m로 냉전시대 서로 체제의 우월성을 경쟁하던 시기에 깃대싸움을 하면서 만들어진 상징적인 유물들이다.

지금도 태극기 교체 예산으로 1년간 1000만원이 책정되고 1번교체시 140만원이 소요된다고 한다. 이 두 마을의 형성 배후에는 DMZ가 있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따라 남북한간의 우발적인 충돌을 막기 위해 설치된?? DMZ(Demilitarized zone), 즉 비무장 지대는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155마일의 군사 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남방 한계선과 북쪽으로 2km 떨어진 북방 한계선의 사이를 말한다.

한반도 전체의 약 0.5%, 3억평(10만ha)의 면적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는 반세기 동안 인간의 발길이 미치지 못했다.

한국의 DMZ는 전쟁, 평화, 그리고 분단, 통일의 상징성뿐만 아니라 개발과 보존의 잠재성도 지니고 있다.

현재 대성동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은 전부 정전협정 이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후손들뿐이다.

현재 거주민은 50세대에 182명. 전쟁전 마을인구수나 지금이나 별 변함이 없다.

시집오는 여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마을로 들어 올수 없는 특수지역이기 때문이다.

대성동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큰 제한을 받고 있다.

남한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는 유엔사 관할지역으로 마을주민들은 참정권과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갖는 면은 다른 지역의 국민들과 같으나,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는 면제받고 있으며,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거주 이전의 자유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제한을 받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대성동이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특혜이고 제한인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

다만 경작권만 주어지는데 1가구당 평균 10만 평방미터 내외의 면적을 경작하고 있어 연간 소득도 6500만원에서 1억 원가량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1년에 8개월 이상 거주하지 않으면 마을을 떠나야 하나 중고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예외다.

대성초등학교가 이 마을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중학교 이상의 학교에 다니려면 이곳 마을을 떠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밤 12시면 마을을 다닐 수 없는 통행금지시간이 있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대북 대남 비방선전방송을 중지하기로 합의한 이후부터는 마을에 고요함이 찾아왔고 평화로움을 회복했다고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처럼 평화스럽게만 보이는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지구상에서 군사적 긴장이 가장 높은 곳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심한 스트레스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또 이 마을 사람들은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소득이 높고 외출도 자유로워 더 러 외지로 나가 유흥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경작은 자유롭게 하되 내 소유가 아무 것도 없는 특이한 제도 속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없어 불확실성이 마을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다. 이 곳 마을 사람들은 비록 남북이 화해하고 교류협력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분단사의 희생자라는 박탈감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평이한 삶을 살아가기에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을 적대해야하는 상황에서 살아야 했던 이 마을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선 남북이 완전한 통일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과 경계선을 치우는 것이 우선해야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일은 이미 시작된 듯 보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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