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색(本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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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사람도, 사물도 저마다 본디의 빛깔을 갖는다. 그게 본색이다.

하늘과 바다와 산과 들은 푸르다. 새 중에도 백조와 해오라기는 희지만, 까마귀는 온몸이 새까맣고 팔색조는 여러 빛깔로 깃털을 덮는다.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변하는 것도 있어 본색을 말하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 문학제에 참석하기 위해 백양사로 가는 길이었다. 차가 노선을 이탈해 내장산으로 내달린다. 뜻밖의 탈선이다. 정 많은 광주의 K시인은 제주에서 올라간 나를 공항으로 마중하더니, 단풍까지 챙기려는 의중이다. 한라산 단풍이 내장이나 설악에는 못 미치는 걸 모를 리 없는 그다. 전북 정읍과 고창, 거기서 거기로 한 맥으로 흐르는 두 곳의 단풍을 한꺼번에 섭렵하는 호사를 누렸다.

시간이 띄운 뗏목을 또 늦가을의 포구에 접안했으니, 계절이 기울 만큼 기울어 단풍의 기운도 거지반 퇴락해 있었다. 그래도 능선을 타고 내려 길가에 서 있는 나무들이 단풍으로 활활 타오르니 신기(新奇)하다.

박학다식한 K시인이 길섶의 단풍에 홀려 있는 내게 퍼뜩 한마디 한다.

“저 단풍 빛이 나무의 본색입니다. 초록은 단풍을 준비해 온 것이고요.”

그 말에 노루잠 물리듯 의식이 함께 깨어난다. 나뭇잎의 색소에 있는 엽록소나 화청소가 늦가을이 되면 붉게 혹은 노랗게 변해 단풍으로 달아오르는 색, 저게 나무의 본색이란다. 푸름에 물릴 만큼 물려 그게 임계에 닿았으니 저리 곱디고운 본색을 내놓을 법하다. 미당도 ‘초록이 지쳐서 단풍’이라 했거늘.

그렇다. 저렇게 활활 불붙는 빛깔이니, 본색인 게 맞는 말이다. 가을의 칼칼한 햇살과 한기 서린 갈바람과 새벽녘 무심코 내려앉는 무서리에 깨어난 저 빛깔이 나무의 본색인 게 백 번 맞는 말이려니 했다.

나무의 본색이 단풍이면, 사람의 본색은 본성이다. 드디어 본색을 갖췄다고 한다. 지니고 있던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는 뜻이다. 흐트러졌던 매무새 고치고 흔들렸던 질서가 원상으로 복귀했다는 얘기다. 인간다움을 드러내는 본색은 원형질적인 것으로 정녕 그 사람의 본연이다.

하지만, 사람이 양심을 잃으면 빛바래 바탕색인 본색을 버린다. 특히 약한 자를 쥐어흔드는 갑질의 전횡, 흔한 정치권의 이합집산도 이를테면 본색이 변하는 것이다. 본색이 지워지면 퇴색한다. 사람은 본색일 때 아름답고 순정(純正)하나, 탈색하고 변색하면 칙칙해 추하다.

일이 다급해지자 본색이 드러난다고 한다. 말의 뉘앙스 그대로 갑자기 내비치는 본색은 낯선 빛깔이라 당혹스럽다. 오랫동안 쌓아 온 견고한 신뢰에 금이 갈 것은 빤한 일이다. 관계의 무너짐은 허망하다.

한 번 떠난 마음을 복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쳐먹는다 해도 이전으로 이가 잘 맞춰지지 않는다. 질리게 살아온 헌 집을 수리하고 남루가 된 옷을 수선하는 것과는 근본이 다르다. 마음은 외형 같은 실체가 없지 않은가.

‘단풍을 나무의 본색이라’ 한 K시인의 말이 울림으로 오더니, 길지 않은 여행길 에 혼곤히 잠들었던 마음속으로 잔잔한 파장을 부른다. 요즘 참 심난하다. ‘한 제호의 두 신문’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가위 충격이다. 강풍에 무너진 나무를 일으켜 곧게 받쳤더니 오불관언하던 자가 갑자기 튀어나와 ‘내 나무요.’하는 건 이상한 본색이다. 사람들은 온몸으로 나무를 받쳐 온 쪽으로 모여든다. 그게 상리(常理)다.

본색은 밝은 색이다. 어느 쪽이 제주의 본성이고 본연인지 사람들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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