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바람이 풀을 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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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5개월의 지사 근무를 끝내고 본사로 자리를 옮기자 많은 전화를 받았다. 신문사의 사정을 알고 있는지라 축하와 격려가 뒤섞였다. 오래전 시골 중학교에서 까까머리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은사님은 사자성어로 다독여주셨다. 지금은 언론계에 있으면서 ‘자의의 영혼’을 강조하는 은사님의 메시지는 ‘질풍경초疾風勁草)’였다. 술자리에서 제자가 풀이 죽어 있으면 적절한 사자성어를 동원해 응원하곤 했지만, 전화 속의 질풍경초는 생소했다.

 
이를 알아차린 듯 차근차근 풀이를 해줬다. 모진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강한 풀이라는  것이다. 거친 바람이 가녀린 풀을 억세고 강하게 만든다고 했다. 제자가 처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좌절하지 말고 슬기롭게 헤쳐나가라는 애틋한 의미를 담은 것 같아 가슴이 짠했다.

 
▲질풍경초는 ‘후한서(後漢書)’에 나온다. 후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된 유수(劉秀)가 전투에서 크게 패했을 때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왕패(王覇)에게 한 말이었다.

 

 유수가 낙양(洛陽)에서 패하자 많은 무리가  이탈했다. 그는 이를 개탄하며 왕패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천에서 나를 따랐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그대만이 남았소. 계속 노력해 봅시다. 세찬 바람이 불어야 강한 풀을 알 수 있는 것이오.”


뒷날 유수가 후한의 광무제가 된 후 왕패를 중용했음을 말할 것도 없다.

 

질풍경초의 이야기를 알고 나자 자연스레 세한도(歲寒圖)가 떠올랐다.

 

‘歲寒 然後知 松柏之後彫也ㆍ세한 연후지 송백지후조야’라. 엄동설한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제주 대정골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는 벗과 제자들이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는 염량세태를 절감하자 매서운 제주 바람은 바람도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에게는 이름에 걸맞은 ‘이상적인’ 제자가 있었다. 제자 이상적은 역관으로서 중국 명나라에 드나들면서 구입한 귀한 책들을 보내주면서 멀리서나마 그의 곁을 지켰다.
추사에게 그는 초라한 집 한 채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노송이며 잣나무였다.

▲농부의 아들이라 풀(草)의 생리를 잘 안다. 농부의 가벼운 손놀림에 쉽게 뿌리를 드러내는 풀이 있는가 하면 농부의 진땀을 쏙 빼는 풀이 있다. 쉽게 자란 풀은 뿌리도 쉽게 드러낸다. 

 

허우대와 상관없다. 보기와 다르게 온실 속 화초처럼 유약하고 근성이 없다. 한 번의 호미질에 순순히 뽑힌다. 반면 농부의 손에 의해 한두 번 생채기를 당한 풀은 다르다. 어디서 그런 근성이 생겼는지 뿌리를 깊게 박는다. 억세게 강해 웬만한 호미질에는 끄떡 하지 않는다. 줄기가 끊어질언정 좀처럼 뿌리를 상납하지 않는다. 그 만큼 심지(心志)가 있다.

 

거친 환경이 가녀린 풀을 차돌 같은 경초(勁草)로 변신시킨 것이다.

 

지금 ㈜제주일보에는 소나무, 잣나무와 어우러져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경초들이 즐비하다. 엄동설한에는

 

 

더욱 푸르고 깊을 것이다.

 

고동수 편집국장 esook@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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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개 2015-12-07 14:33:45
질풍경초는 거저 해 보는 말이아니다. 독자들은 제주일보가 처한 현실을 잘 안다. 고동수 국장이 지혜롭게 이 난국을 헤쳐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