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배인 중 유일한 왕 '드라마틱한 삶'
(43)유배인 중 유일한 왕 '드라마틱한 삶'
  • 좌동철 기자
  • 승인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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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유배길을 걷다...만인지상에서 죄인으로
   
▲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광해군 묘(왼쪽)과 부인 유씨의 묘(오른쪽).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제주에는 260여 명의 유배인이 왔다. 살아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사약을 받거나 병사를 하거나 돌아가지 않고 제주도민이 된 사람도 많았다. 본지는 4회에 걸쳐 유배인들이 남긴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광해군(1575~1641)은 조선의 왕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7년간의 임진왜란에서 분조(分朝·임시 조정)를 이끌며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허준을 통해 동의보감을 펴내면서 민심을 수습했다.

1618년 명나라의 요청에 강홍립을 도원수로 군사 1만명을 파병했지만 후금(청나라)이 승리하자 투항토록 해 후금과 적당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실리 외교를 벌였다.

하지만 후궁 출신인 광해군은 선조가 아꼈던 이복동생이자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했고, 그의 모친인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는 등 왕위를 위협했던 세력을 제거했다.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일으킨 패륜 군주로 낙인찍힌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된 광해군은 이곳에서 1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병자호란에서 패한 인조가 청 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한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 있던 1637년 광해군은 제주에 유배를 오게 된다.

조정은 광해군이 청나라에 의해 복위될 것을 우려해 가장 먼 변방인 제주로 보냈다.

강화도에서 출발한 그는 자신이 가는 곳을 몰랐다. 조정은 무신 이원로 등 호송자에게 엄명을 내려 목적지를 비밀에 부치도록 했고, 배 위에는 4면에 휘장을 둘러 밖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배가 포구에 닿은 후에야 제주에 온 것을 알게 된 그는 “내가 어찌해 여기 왔을까”라며 탄식을 했다고 한다.

제주에 온 유배인 중 왕족은 있었지만 왕은 광해군이 유일했다.

유배길의 출발은 1637년 6월 광해군을 실은 배가 들어온 제주시 구좌읍 행원포구에서 시작된다.

길은 행원포구~노씨부인 대비공원~명도암~화북포구~관덕정~광해군 적거터까지 구좌읍에서 제주시 원도심을 아우르고 있다.

이형상 목사가 쓴 남환박물에는 광해군은 제주성 서문 안에 위리안치된 것으로 기록됐다.

유배의 유형에는 고향에 보내는 본향안치, 섬에 유폐시키는 절도안치가 있다. 집 주위에 가시 울타리를 둘러쳐 배소에 가둬 놓는 위리안치는 중죄인에게 적용됐다.

제주시는 2007년 고증을 거쳐 중앙로 KB국민은행 제주지점 앞 광해군 적소터에 표지석이 세웠다.

광해군은 호송하던 별장들이 윗방을 차지하고 그 아래채에 재우는 모욕을 줘도 입을 다물었고, 유배 생활 중 계집종이 “할아범”이라고 멸시해도 참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만인지상에서 죄인이 된 그는 제주에 온 지 4년 4개월 만인 1641년 7월 1일 67세 나이로 병사했다.

일국의 왕으로는 쓸쓸한 최후였지만 조선에서 4번째로 장수한 임금이기도 했다.

이시방 제주목사는 천리 길을 오고 가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릴 경우 시신이 썩을까봐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염을 했다. 이로 미뤄 광해군은 외부와 엄격히 통제됐음이 짐작된다.

가장 빠른 배로 조정에 소식이 알려지자 인조는 7일 간 소찬으로 식사를 하며 조의를 표했다.

7월 27일 예조참의 채유후 등이 호상을 위해 제주에 들어왔다. 빈소는 관덕정으로 옮겨 대제가 거행했고, 시제는 제주목사가 맡았다.

상이 끝나자 광해군의 시신은 8월 18일 화북포구로 나갔다. 그는 자기가 죽으면 어머니 공빈 김씨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유언대로 경기 남양주시 묘역에 묻혔다.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 양진건 교수팀은 2013년 ‘광해왕 유배길’을 조성하고, ‘광해, 유배길을 걷다’라는 책을 펴내 그의 생애를 재조명했다.

양진건 교수는 “광해군은 전직 임금이라는 신분 때문에 유배 자체가 제주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며 “관덕정에서 거행됐던 대제를 재현해 관광·문화 자원으로 활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광해군은 사후에 복권되지 못해 조(祖)나 종(宗)이 붙는 묘호(廟號·공덕을 칭송해 붙인 호칭)를 갖지 못했지만 강력한 전란 복구 정책과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펼친 국제 정치 감각은 오늘날 재평가되어야 할 인물로 거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