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과 모방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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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내겐 신문을 보다 스크랩하거나 책을 읽다 메모하는 버릇이 있다. 책은 저자의 유?무명을 가리지 않는다. 그냥 지나치면 가뭇없이 지워져 버릴 것이므로 아까운 보물을 잃을세라 가위를 들거나 메모 수첩을 찾는 것이다. 등단하면서 더 많이, 더 꼼꼼히 챙기게 된 것도 눈에 띄는 변화라 한다.

그것들을 알곡처럼 곳간에 차곡차곡 재어 둔다. 모두 글쓰기를 위한 내 자산이다. 모방을 통해 내가 진화해 왔음을 솔직히 토설한다. 자신에게 진솔할 필요가 있다. 제재의 빈곤이 나를 옥죌 때, 나는 그 자산을 헤쳐 놓아 모방할 만한 문장이나 어휘를 찾아들고 환호작약한다. 그게 무에 어떤가. 오래된 글쓰기 습관인 것을. 내게 엄호사격이라도 해주듯 어느 작가가 귀띔한다. “슬픔이 진화하면 눈물이 되듯이 차용해 온 문장을 다시 한 번 비틀면 표 나지 않는 명문장이 됩니다. 논문을 써야 하는 대학교수가 되지 않은 걸 퍽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 했다. 나무 한 그루, 풀 잎 하나의 흔들림, 사계를 두고 울긋불긋 펼치는 색채의 마술만 봐도 그 함의를 거뜬히 엿볼 수 있다. 눈 치켜뜨고 보지 않아도 자연의 흔들림이 시로 무용으로 형상화하는가 하면, 다양한 원색이 미술의 기법으로 발효했음 직하다.

그렇더라도 “모방의 끝에서 창조는 시작된다.”고 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에 기대어 “나는 모방에 절어 글을 쓰는 사람이오.”라 하지는 않겠다. 모방도 한도가 있는 법, 남의 글과 목소리, 문장의 호흡을 재탕하듯 베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가에겐 문학적 역량 이전에 문인으로서의 고집과 자존이 있다. 양심과 명예가 있다.

국민 작가라는 분이 일본 소설을 베꼈다 해서 표절시비로 문단이 너저분한 소음으로 너울 쳤던 게 불과 몇 달 전의 일. 본인이 어물쩍 넘기려는(?) 불통에다 평론가 부군까지 옹위하고 나서는 걸 보며 분통을 달랠 길 없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언어를 주무르는 작가에게 표절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태백산맥’?을 쓴 작가 조정래가 한소리 했다. “운동선수만 은퇴하는 게 아니다. 예술가도 능력이 안 되겠다 싶으면 깨끗이 돌아서야 한다. 더하기 위해 지저분하게 이것저것 엮어서 하는데, 그건 모독이다. 표절은 자살행위이면서 타살행위다.” 작품을 통해서 자기 인생의 여러 가지를 구하고 신뢰하며 읽어 준 독자들의 영혼을 죽인 것이라는 그의 어조는 단호하다.

실수를 했을 때, 정말 잘못했다고 진심으로 뉘우치면 용서가 된다. 그렇지 않으니 작가와 독자 간에 갈등만 키우는 것이다. 괜한 앙금 탓인지, 추위에 움츠러드는 데다 울울한 심사 가눌 길이 없다.

동국대학교가 학내 문제로 소란스럽다. 수상쩍은 두 스님이 총장과 이사장에 선출된 게 발단이란다. 부총학생회장은 단식 50일째로 급기야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데, 단식이 더 이어지면 생명이 위태롭다니 심각하다. 총장 지위에 있는 스님의 논문 표절 의혹이 수위를 넘은 듯하다. 대학 윤리위원회가 밝힌 바로는 논문 30편 중 명백한 표절 2편, 비난 여지가 심각한 중복 게재 3편, 그럴 여지가 약한 중복 게재 13편으로 절반 이상이 표절과 짜깁기라는 얘기다.

왜 이럴까. 작가로서,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표절 행위는 치명적이다. 그걸 무의식의 선택이라 변명이라도 하려는가. 자업자득이다. 제 능력을 알고 그에 따라 처신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스크랩북과 메모수첩을 되작거리다 흠칫 놀라 먼 산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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