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 최익현 구국정신, 항일운동으로 꽃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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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유배길...최익현 영향 유림들이 독립운동 나서
   
▲ 항일의사 12인의 구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지난 5일 열린 ‘제3회 조설대 집의계 애국지사 경모식’에서 참가자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면암 최익현(1833~1906)은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는 대쪽 같은 삶을 살았다. 74세에는 최고령 의병장으로 나서면서 조국 수호를 위해 최일선에 섰다.

동부승지와 호조참판을 역임한 그는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과 원납전 발행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10년간 집권한 대원군을 물러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왕의 아버지인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제주에 유배됐다. 유배 기간은 1873년 12월부터 1875년 3월까지 1년 반이다.

최익현은 유배 생활 중 많은 학자들과 교류를 했다. 당시 제주 유림에선 도학으로는 안달삼, 시학으로는 김희정을 일인자로 꼽았다. 이들은 면암을 통해 학문적 능력이 더욱 향상됐다.

면암이 가장 가깝게 지낸 지인은 조선 말기 제주의 대표 유학자 이기온(1834~1886)이다.

이기온은 호남의 마지막 거장 기정진 문하에서 수학한 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했다.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에 ‘문연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다. 서당은 아들 이응호가 계승했다.

면암의 가르침을 이어 받은 이응호 등 12인의 지사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자 집의계(集義契·의병결사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이듬해 11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당에서 1.2㎞ 떨어진 오라동 망배단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했다. 또 이곳 바위에 ‘조선(朝鮮)의 수치를 설욕(雪辱)하겠다’는 의미로 ‘朝雪臺(조설대)’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이 같은 선언은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기 이전인 1905년 민족의식을 지녔던 유림과 도민들이 결합한 초기 항일운동으로 꼽히고 있다.

2012년 개설된 면암 유배길은 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있다. 오라동 연미마을에서 출발해 조설대~민오름~정실마을~방선문 계곡까지 5.5㎞로 걸어서 2시간이 소요된다.

최익현은 아전 윤규환의 집, 현재 중앙로터리 북쪽 칠성통 사거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유배가 풀리던 1875년 3월 한라산에 오르고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를 남겼다. 최익현은 한라산에 오를 때 이기온으로부터 길 안내를 받았다.

이 인연으로 이기온은 면암의 휘호를 받아 백록담과 방선문 암벽에 이름을 새겼다.

면암은 유배에서 풀려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상소를 올렸다. 1876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로 들어와 개항을 요구하는 소식을 접한 그는 통상조약을 반대했다.

이번엔 도끼를 지니고 대궐문 앞에 엎드려 읍소했다. 상소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겠다는 결의를 표현한 것이다. 이 일로 면암은 흑산도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1905년 을사녹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이듬해 최고령 의병장으로 나섰다. 1906년 4월 전북 정읍에서 거병을 했고, 관아의 무기를 접수했다.

행군을 하며 순창에 집결했을 때는 군세가 4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병력과 무기가 열세였던 최익현은 그 해 6월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체포됐다.

일제는 재판에서 최익현에게 대마도 감금 3년형을 선고하고, 강제로 압송했다. 그는 일제가 주는 음식은 받지 않겠다며 단식 투쟁을 벌이다 1906년 11월에 대마도에서 순국했다.

최익현이 목숨을 건 의병항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919년 제주의 3·1운동인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시범과 김시은 등 애국지사는 최익현에게 영향을 받은 전통적인 유림세력이었다.

조천만세운동은 김시우(1875~1918)의 소상날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잡고, 김시우의 집 근처에서 시작됐다. 김시우는 최익현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당대 유학자로 도내 유림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다. 이로 인해 군중을 모을 수 있는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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