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왜구를 물리쳐 국난을 극복한 역사기록
(2)왜구를 물리쳐 국난을 극복한 역사기록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방어유적 민.관.군이 힘을 모은 역사적 산물
   
▲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에 있는 좌가연대(左哥烟臺)와 한경면 두모리에 있는 두모연대(頭毛煙臺)를 공중촬영한 모습.<사진=제주시 제공>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는 언제 어디로 침입할지 모르는 외적에 늘 대비해야 했다.

돌을 나르고 흙을 다지며 쌓은 방어유적은 외적의 침략에 자유로울 수 없었던 군사와 백성들의 희생이 점철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3세기부터 약탈을 일삼았던 왜구는 14세기 막부(幕府·무사 정권)의 교체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됐던 일본 남북조 시대에는 해적집단이 아닌 정규군과 다름없는 선단과 병력을 보유했다.

왜구의 제주 침입 기록을 보면 1316년(충숙왕 3)에서 1556년(명종 11)에 이르는 240년 동안 30회에 이르고 있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적선 600척을 동원해 제주를 침입하자 성주 고신걸이 방어했다. 1377년(우왕 3)에는 200여 척이 침범하기도 했다.

왜구가 빈번하게 침입하면서 고려 말 봉수대가 설치됐고, 1408년(태종 8)에는 판옥선 등 전선(戰船) 10척이 제주에 주둔했다.

본토는 국경의 방어를 위해 진(鎭), 영(營), 보(堡), 책(柵)을 설치한 반면, 제주는 섬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왜구가 배를 가까이 댈 수 있는 해안에 수전소(水戰所·해군기지)와 방호소(防護所)를 설치했고, 수군은 물론 마병·보병을 배치했다.

이처럼 방어를 강화했지만 왜구의 침입은 더욱 잦았고 치열해졌다.

1552년 천미포(성산읍 신천리)에 왜구 200여 명이 상륙, 주민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를 막아내지 못한 김충렬 제주목사와 김인 정의현감은 유배형을 받았고, 후임 제주목사로 임꺽정을 토벌한 무장 남치근이 부임했다.

1554년 왜구는 또 다시 천미포로 침입했으나 민·군이 힘을 합쳐 왜선 2척을 나포하고 다수의 왜구를 사로잡았다(천미포왜변).

1555년 60척의 배에 나눠 탄 왜구 1000여 명은 제주의 관문인 화북포로 침략했다. 이들은 영암·강진·장흥을 유린하고 전라도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을 전사시킨 집단이었다.

화북포로 상륙한 왜구는 남수각 동쪽 언덕에 진을 치고 제주성을 3일간 포위했다(을묘왜변). 이번 침입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제주를 본거지로 삼기 위한 계획적인 침략으로 제주성 함락을 목적에 뒀다.

이에 맞서 김수문 제주목사는 효용군(驍勇軍·용맹스런 군인) 70명을 선발, 적진으로 돌격했다. 격전 끝에 왜구는 수 백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도주했다.

명종은 목사 김수문의 품계를 올려주고 돌격대로 나선 김성조를 건공장군(建功將軍)으로 제수했다.

미천한 신분으로 갑사(甲士·직업 군인)로 지원한 김성조는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 왜구의 수급을 무수히 베어내 승전을 이끌었다.

1556년에도 왜구가 침입했으나 김수문 목사의 지휘 아래 병·마·수군이 왜선 5척을 불태우고 왜구 126명을 사살했다(병진왜변).

병진왜변과 을미왜변을 겪으면서 제주의 방어 체계는 더욱 강화됐다. 조선 전기 3성·23봉수로 구축된 방어시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3성·9진·25봉수·38연대로 확대, 재편됐다.

해안변 최일선에 설치된 연대(煙臺)는 단순히 통신·연락 기능만을 한 것이 아니라 자체 방어와 백성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정보 기능도 함께 수행했다.

연대에서는 가까이 오는 배가 표류선인지 적선인지를 분간해 신속히 보고를 하고 대응을 했다.

방어유적은 민·관·군 모두가 힘을 합쳐 외적을 물리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구축해 국토 수호에 나선 군사시설로, 오늘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역사 유산이자 상징으로 남게 됐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