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맞이 잔상(殘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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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수필가
문명은 인간의 삶의 편의나 욕구를 좇아 발달한다. 인간의 삶의 요소랄 수 있는 의식주의 양태도 문명의 수레에 실려 변모하게 마련이다. 자신의 생의 초점을 행복에 맞춰놓고 삶의 필요를 확장하거나 선택의 폭을 넓혀가는 게 삶이며 일인 시대다. 그게 욕망이 되고, 경쟁이 된다. 전통문화도 이런 시대의 추이에 맞춰 도태되거나 새롭게 형성되어간다. 행복과 즐거움을 더해주는 문화나 풍속만이 지속가능해지는 것이다.

수많은 우리의 전통문화 가운데서도 설맞이 행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가족과 가문의 경계를 넘어 지역의 결속과 민족의 화합을 다지는 거국적인 행사라고나 할까. 설 연휴가 되면 나라 안이 벌집처럼 웅성거린다. 온갖 교통수단이 제 성능이라도 자랑하려는 듯 쏟아져 나온다. 도로가 마비되고, 한가하던 철도나 항만, 공항시설까지도 북새통이 된다. 고향을 찾아 뿌리를 확인하고, 가족 친지와 얼려 추억을 공유하려는 욕망이 몸과 마음을 떠밀기 때문이다.

작년 설이었다. 남들은 고향을 찾는데 우리 내외는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향했다. 아들의 둥지에서 손자의 재롱을 어르며 설맞이를 하는 것도 즐거울 듯싶어서다. 그동안은 아들 녀석이 줄곧 고향을 찾았다. 두 내외가 단출하게 움직이니 오가는 여정이 홀가분하다. 어린 것을 데리고 직장 업무에 맞춰 일정을 고르며 고향을 찾아야 할 아들의 여정이라면 얼마나 고행이랴. 우리 내외야 값싼 항공권이 있는 시기에 맞춰 오가면 그만이니 저렴한 경비로 여행 삼아 설맞이를 하는 셈이다. 거기다 가정의례의 일부를 아들에게 자연스레 넘기는 계기도 된다. 지난 세대의 방식을 따랐던 의례의 법도나 내용들도 저들의 삶에 맞춰보기도 하고. 선대로부터의 전통을 무조건 따르랄 수는 없는 일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란 말처럼 가정의례도 저들의 삶의 양식에 맞게 스스로 설정해 가는 게 좋다. 마지못해 하는 것보다는 자발적인 동인이 생겨나고, 의무나 부담보다는 보람과 낙이 수반돼야 숭조의례도 미풍양속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가친척의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며 차례를 지내고 음복을 했다. 그때는 그런 방식이 효와 예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전통문화로 그 명맥을 이어가기도 힘들게 되고 있다. 일가친척들이 떨어져 살아야 하는 형편이니 때맞춰 오가는 게 예삿일이 아니다. 내 세대의 풍속을 스스로 각색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다. 그 변화의 판세는 점점 가파르다. 문명의 진보가 우리의 삶을 변화의 급류 속으로 몰고 가는 탓이다.

가족끼리 간소하게 설 차례를 지내고 집을 나섰다. 인근지역의 문화행사를 찾아서다. 아침인데도 도로와 공원과 놀이시설은 오색 설빔 물결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거동이 가능한 이들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다양한 인종들이 함께 얼렸으니 ‘만국설빔전람회장’이랄까. 동화 속 풍경처럼 낯선 듯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힘들여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격식에 맞춰 치르는 고전적인 설맞이 풍속을 젊은이들이 식상해하고 기피하는 이유를 알만하다. 내 눈과 귀도 황홀경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데 젊은이들이야 오죽하랴 싶다. 마주하는 얼굴마다 웃음꽃을 피워낸다. 입보다는 눈과 귀의 호사가 더 좋다는 표정들이 아닌가. 하긴 거리를 헤매는 노숙자들도 배는 곯지 않는 세상이다.

이제 가문 고유의 전통의례는 생략되거나 간소화하면서 시대의 표제처럼 스마트하게 변모해 간다. 그게 대세라면 무슨 수로 거스른단 말인가. 풍속은 어차피 시대의 무대에 맞추어 연출되게 마련이다.

머잖아 설이다. 올해는 모두가 쾌적한 설맞이 길이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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