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조상들, 신속한 통신 네트워크 구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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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봉수제도...위급 상황 조정에 알려
   
▲ 탐라순력도의 제주전최(濟州殿最). 전최는 공적 심사라는 뜻으로 제주목사가 관리들의 치적을 심사하는 모습이다
조선시대 산꼭대기에 있는 봉수는 말 그대로 밤에는 봉(烽·횃불), 낮에는 수(燧·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달했던 통신 시설이었다.

외적의 침입 등 국가 안위와 직결된 급보를 조정에 전하기 위해 전국에는 643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전남 순천에서 한양까지 85개 봉수대를, 경남 동래에서 한양까지 154개 봉수대를 거쳐 한양의 목멱산(남산)으로 송신해 왕에게 위기 상황을 알렸다.

함경도나 평안도의 국경에서 오후에 봉화를 올리면 해질 무렵 목멱산과 가까운 아차산 봉수대에 도달했다는 기록을 미루어 볼 때 전달 속도는 1시간에 100㎞로 추정되고 있다.

12시간이면 전국 어느 곳에서 보낸 신호든지 한양에 도달했다.

봉수는 평상시에는 횃불 1거를 올렸다. 한양 사람들은 목멱산의 봉수가 하나만 올라가면 하루가 무사하게 지났음을 알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적이 나타나면 2거, 경계에 접근하면 3거, 경계를 침범하면 4거, 접전 중이면 5거를 올렸다.

안개나 비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화포나 나팔 등과 같은 소리를 이용해 전달하기도 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봉수군이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사람이 운영하는 만큼 오보가 발생했고, 전쟁이 나도 정작 제구실을 못한 경우도 있었다.

조정은 봉수군의 기강을 잡기 위해 처벌 규정을 뒀다. 적이 출현하거나 국경에 다가왔을 때 거화하지 않으면 긴 막대기로 볼기를 치는 장형 100대에 처했다. 적의 침입을 보고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런 처벌에도 봉수군의 근무 태만은 늘어났다. 1513년 왜적이 전라·충청 지역에 침입해 20일 동안 난립해도 봉화를 올리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한 달이 넘도록 전쟁 상황을 알리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195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의 모든 봉수가 끊어졌다. 왜군은 남산에 있는 봉수대를 파손하고 그들의 진지인 왜장대(성)를 쌓으면서 봉수 기능이 마비됐다.

봉수에 대한 무용론이 나오면서 급기야 1605년(선조 38년)에는 말을 타거나 사람이 달려가서 소식을 전하는 파발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봉수의 순차적인 신호 전달 체계는 오늘날 빛처럼 직진하는 파장을 이용한 무선 통신 방식과 유사하다.

봉수대는 오늘날 산에 세워진 무선 통신 중계소 위치와 20% 정도 일치하고 있다.

본토의 봉수대 중 가장 먼 거리는 50리(19.6㎞)다.

반면, 제주에서 전남 해남까지 거리는 290리(115㎞)로 횃불과 연기로 통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형상 제주목사가 저술한 제주도 인문지리지인 남환박물(南宦博物·1702년)에는 한라산 중턱에 봉수대가 있어서 전남 해남까지 통보한 적도 있지만 해무가 자주 끼면서 철폐했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봉수로 조정에 위기 상황을 직접 알리지 못하게 됐다. 그래서 제주목사는 외적이 침입하면 선 조치, 후 보고를 했다. 조치 내용은 서신으로 전라도 관찰사에 보냈다.

전근대 국가에서 중요하면서도 보편적인 통신 방법이던 봉수는 부침을 거듭했다. 1885년 전신, 1890년 전화 등 전기를 이용한 근대적인 통신 방식이 도입되면서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 이후부터 봉수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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