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목민관이자 방어실태 점검한 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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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286명 부임한 제주목사 위상과 역할
   
▲ 제주목 관아에서 집무를 보고 있는 제주목사를 재현한 모습
봄·가을 2차례에 걸쳐 방어 실태를 점검하는 ‘순력(巡歷)’은 조선시대 팔도(八道)에 파견된 관찰사의 주요 임무였다.

제주는 섬이라는 점을 감안, 제주목사에게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를 겸직토록 하는 등 군 통수권을 부여하고 순력을 맡겼다.

이형상 목사가 1702년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순력을 기록한 화첩이 탐라순력도다.

탐라순력도에서 시사(試士)와 강사(講射)는 군사들의 활쏘기 대회 및 시험 장면을 그린 것이다.

전최(殿最·공적 심사)는 제주 관리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그림이다. 이를 볼 때 순력의 목적이 방어시설과 군기 점검의 비중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강화도 탈환의 임무를 맡아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1816~1888)는 1865년 제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저술한 훈민편(訓民篇)에는 제주목사(정3품)가 배에서 내릴 때 예포를 발사하고, 화북포구에서 관덕정에 이르는 행차와 목사를 보좌하는 판관(종5품), 정의현감(종6품), 대정현감(종6품)의 군례를 받고 연희각에서 연회를 마치기까지의 절차를 기록했다.

양헌수 목사의 훈민편과 제주목 관아에서 발견된 영해창수록를 엮은 도영절차(到營節次)는 제주목사의 취임식을 세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조선 시대(1392~1910년 기준)에 부임한 제주목사는 286명이며, 평균 재임기간은 1년 10개월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만호(萬戶) 또는 안무사(按撫使)의 직책을 겸했다가 조선 중기부터 절제사와 방어사란 직책이 겸임됐다. 이는 명칭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군직(軍職)의 겸임이라는 데는 큰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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