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진 제주목사 건의로 편제
조선 초기 군(郡)이 설치됐던 제주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4면(面), 17현(縣)이 있었다.
제주목사 겸 안무사 오식(吳湜·1370~1426)은 제주가 섬이지만 매우 넓다는 것을 실감했다. 또 왜구의 침입 등 사변이 발생했을 때 빠른 정보 전달과 대응이 중요했다.
1416년(태종 16년) 오식은 이런 상황에 대해 왕에게 건의를 했다.
“한라산이 중앙에 웅거한 가운데 목사가 있는 본읍(本邑)은 산 북쪽에 있어서 동·서로는 90리(35㎞) 거리에 있고, 산(山)남쪽은 더 멀다. 백성들이 왕래하는 데 반드시 두 세 밤을 유숙해야 하고, 관(官)이 공문을 보내는 데도 연일 뒤진다. 동·서와 남쪽에 사는 사람들이 본읍(本邑)을 왕래하는 게 매우 어렵고, 농번기에 오가는 데 폐단이 적지 않다.”
오식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제주는 3읍으로 편제됐다. 제주목 외에 동쪽에 정의현, 서쪽에 대정현이 설치됐고, 현감(종6품)을 뒀다. 3읍 체제는 1416~1914년까지 조선 왕조 500년간 유지됐다.
초대 정의현감은 이이(李貽)가 부임했다. 정의성은 처음에 성산읍 고성리에 있었으나 너무 동쪽에 치우쳐 백성들이 불편함에 따라 1423년 지금의 표선면 성읍리로 읍성을 옮겼다.
초대 대정현감은 유신(兪信)이 부임했고, 동성리(인성·안성리)와 서성리(보성리)를 중심으로 석축을 쌓아 대정성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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