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칠반천역 하나인 봉수군들의 고된 일상
(7) 칠반천역 하나인 봉수군들의 고된 일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산꼭대기 올라가 경계 역할...불씨도 잘 간직해야

봉수대를 관리하는 봉수군은 근처 지역주민들로 선발했다. 봉수군을 지칭하는 용어로는 봉졸·봉화간·봉화군·간망군·후망인 등 다양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늘 멀리 살펴보며 경계하는 후망(堠望) 역할과 봉화를 드는 임무는 고됐다.

또 매일 불을 다루는 일을 해서 겨울철에도 장작이나 불쏘시개, 불씨를 오름 정상까지 운반한 후 잘 관리하고 유지해야 했다.

이래서 봉군(烽軍)으로 차출되면 생업 따위는 포기해야 했다.

일이 너무 힘들어 봉군은 조선시대 일곱 가지 천대받는 구실아치인 칠반천역(七班賤役) 중 하나였다.

칠반천역은 신분은 양인이나 역(役)으로는 천민의 대우를 받았던 계층이었다. 고을의 잡역을 맡던 일수(日守), 의금부의 나장(羅將), 조운창의 조졸(漕卒), 수군(水軍) 등이 포함됐다.

일반 군역은 60세가 넘으면 끝났지만 봉수군은 인원이 부족하면 군역이 연장되기도 했다.

1456년(세조 2) 남포(藍浦·충남 보령)의 봉수군 이덕명은 65세가 되도 봉수대에서 벗어나질 못하자 승려에게 부탁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면서 군역을 면했다.

1503년(연산군 9년) 진상품의 관한 일을 맡았던 사재감 첨정 유계종은 “평안도에서 봉수군의 일은 매우 괴로워 무예를 가진 사람은 갑사나 기병에 들어가고, 약하고 빈약한 사람만 봉수군에 들어갔는데 적과 대응하지 못해 포로가 되기도 했다”고 진언했다.

봉수군은 기피 대상이 되면서 나중에는 결원을 메우기도 어렵게 됐다. 1746년(영조 22) 병조는 봉수군의 어려움을 아뢰자 왕은 일체의 잡역에서 면제해 본연의 업무만 맡도록 했다.

한편, 봉수에는 12~24명의 봉수군을 지휘·감독하고 자체 방어를 관장하는 하급장교인 별장(別將)을 뒀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