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4면의 바다를 경계하고 지켜 온 연대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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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시설과 정보 수집 이어 군사 요새도 겸해
▲ 1914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 해안 인근에 있었던 산방연대 사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연대(煙臺)는 해안 최전방에 위치한 군사 기지이자 통신 기능을 담당했다.

연대의 정확한 명칭은 연변봉수(沿邊烽燧)로 해안 변에 설치된 봉수대로 보면 된다. 제주병제봉대총록(濟州兵制烽臺總錄)에 따르면 17세기 후반 38곳의 연대가 있었다.

연대는 자체 방어와 함께 주민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정보 기능도 함께 수행했다. 해안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건립된 연대에서는 바다를 포함, 주변을 정찰하고 자체 방어 등 군사 요새의 역할도 겸했다.

1782년(정조 6) 왕의 특명으로 민심을 달래기 위해 파견된 제주순무어사 박천형이 작성한 서계(書啓·보고서)에 따르면 오름에 있는 봉수는 멀리서 적선(賊船)이 바다에 지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반면, 연대는 가까이 오는 배가 적선인지, 표류선인지를 확인하고, 관찰하는 곳이라고 기록했다.

해안 최일선에 설치된 연대는 봉수대의 역할 뿐만 아니라 적의 침략 시 자체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해풍의 영향을 자주 받는 것을 감안, 연대 위에는 연기가 수직으로 올라가도록 길쭉한 연통(烟筒)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호 체계는 평상시에 횃불 또는 연기 1홰를 올렸다. 적이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침범하면 4홰, 접전 중이면 5홰를 올렸다.

연대의 규모는 지형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높이는 3~4m, 길이와 너비는 6~10m 내·외로 돌을 쌓아 구축했다.

초기에는 봉수군 2명이 한 조로 5일마다 돌아가며 근무하다가 조선 중기인 1744년(영조 20)에는 5명이 한 조를 이뤄 6일마다 번갈아가며 근무를 섰다.

연대 주위에는 깊게 파놓은 참호 외에 흙이나 돌로 담장처럼 두룬 방호벽을 구축했다. 방호벽은 봉수군의 생활시설인 주거용 건물을 보호하는 한편,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 방화선의 구실도 했다.

연대의 위치는 해발고도 3~30m의 해안 구릉에 있었다. 현재 확인이 된 연대 36곳 중 서로 상응하는 거리가 7㎞ 이내가 29곳, 7㎞ 이상이 7곳이다.

서로의 거리는 최단 1리(559m)에서 함덕~무주연대처럼 최장 25리(13.98㎞)까지 배치돼 연기나 불빛으로 신호를 전달했다.

제주도 해안을 한 바퀴 둘러싸면서 설치된 연대는 대부분 사다리꼴의 네모난 모양으로 축조됐다.

한편, 1574년(선조 7)에서 1884년(고종 21)까지 310년간 이국인(異國人·외국인)의 제주에 표류한 것은 대략 45회에 이르고 있다. 표류인 대다수는 중국인과 일본인이고 그 외에 서양인도 있었다.

또 왜구의 제주 침입 기록을 보면 1316년(충숙왕 3)에서 1556년(명종 11)에 이르는 240년 동안 30회에 이른다.

해안 최일선에 있던 연대는 이국인의 표류는 물론 왜적의 침입을 신속히 알리고 방어를 해야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연대는 1973년 제주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문헌 기록과 달리 참호나 방호벽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는 연대가 있는가 하면 아궁이처럼 하늘을 향해 돌로 쌓았을 연통이 발견되지 않는 것에 대해선 자료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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