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숨과 날숨
들숨과 날숨
  • 제주신보
  • 승인 201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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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녀 수필가

밤사이 눈이 내렸다. 나의 작은 정원이 소담스레 쌓인 눈으로 한결 아늑하다. 대기에 이리도 많은 물이 떠 있었던가. 미시세계에 존재하는 수증기의 변신에 다시 놀라워진다. 딱히 외출할 일도 없으니 이참에 깊이 침잠하여 마음을 다스려 보는 것도 좋을 일. 굳이 전화를 걸 일도, 걸려오지도 않았다. 문자만으로도 소통하는 세상이니 고요함을 누리기에 얼마나 좋은가. 덮어두었던 책을 펼친다.

 

바깥 눈 세상이 궁금하여 중간 창문을 빠끔히 열어놓았다. 눈은 여전히 세차게 몰아친다. 현관으로 나가보니 대지가 온통 순백의 세상이다. 마당 한편에 자리한 동백나무로 눈길을 보냈다. 염려와는 달리 연둣빛 잎들은 두껍게 쌓인 눈의 무게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다. 참 다행이다.  지난 가을이었다.

 

마당에 있는 동백나무가 흉측하게 변해 있어 가까이서 살피다가 아연실색을 하였다. 나무엔 수많은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게 아닌가. 급한 마음에 나무를 베어달라고 전화했더니 전정기술자가 와서 보고는 지금 손을 댈 수 없다며 약을 뿌려댔다. 벌레들이 툭툭 떨어졌다. 동백꽃들이 처연히 떨어지며 붉게 수놓던 바로 그 자리에. 그런 후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으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되도록 몰랐다니…. 그러고 보니 나무가 이토록 중병이 든 데에는 내 탓이 크다. 그렇다. 한 울타리 안에 공존하는 이들을 드난살이쯤으로만 여겼던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나무는 가지만 잘라주면 되는 줄 알았지 이토록 벌레들이 침입하여 야금야금 갉아먹을 줄 누가 알았으랴. 애초부터 나는 나무나 꽃이, 제집처럼 날아드는 비둘기들이 건네는 말에 귀 기울인 적이 없는 듯하다. 어디 그 뿐이랴. 바람과 별 그리고 초여름 밤 대기에 떠다니는 안개, 모든 자연의 인연들에 대하여 관조적이지 못했다. 바삐 살아온 탓 만일까. 애써 변명거리를 떠올려 본다.

 

병든 나무를 보고 있자니 투병하는 지인이 떠올랐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알은체를 해야 하는지 망설이다가 전화를 했더니 들려오는 목소리가 좋아 마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병원에서 만난 모습엔 힘겨운 기색이 역력했다. 소리 없이 번지는 이상세포의 증식을 이겨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알베르 까뮈는『시지프 신화』에서 산정山頂을 향한 끊임없는 투쟁을 그리고 있다. 신이 내린 형벌로 시지프는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린다. 하지만 바위는 순식간에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굴려 올리지만 번번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마는, 그러나 그만 둘 수가 없다.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향하여 끊임없이 내려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의식의 시간이므로. 누구나 삶의 여정에서 자기 몫의 바위를 안고 산다. 돌아서고 싶은 순간들을 삼키며 그림자처럼 떠안은 바위를 숱하게 밀며 올라간다. 그러기에 까뮈는 부조리를 인식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스스로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기에.

 

찬바람이 대지를 쓸고 오던 늦가을, 황량하던 동백나무에 새살이 돋고 있었다. 아니 겨울을 앞두고 새 잎이 나오다니. 봄에만 싹이 튼다는 단순한 생각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니 상록수다. 한겨울부터 꽃망울을 터뜨리려면 쉴 새가 없겠지. 나름대로 추론하며 내심 머쓱해 한다. 찬 기운 속에서도 이파리들은 쑥쑥 돋아나며 차츰 제 모습을 갖추어갔다. 태초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눈 속에서, 어둠이 조용히 내려와 온 사위를 감싸면 불빛에 반사하는 설원의 빛은 달빛 가득한 어느 시골집 마당에서 함초롬히 빛나던 마가렛 꽃무리를 닮았다. 그렇게 시간개념을 허물며 침묵한 며칠이 나에게는 깊은 사유의 시간이었다. 적막함 속에서 온전히 내 본성의 심연과 마주하기를 바랐다. 고요함이 나를 이끌어주었다. 그리고 잊고 싶은 악몽들이 하나씩 흙탕물에서 빠져나갔다.

 

눈이 그쳤다. 쌓인 눈도 녹아간다. 대기는 또다시 넓은 가슴으로 이들을 품어줄 터. 동백나무에 남아있는 듬성듬성한 눈덩이 사이로 어린잎들이 파릇이 고개를 내민다. 마침 지인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힘든 과정이 일단 끝났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렇지. 모든 건 이 또한 지나가는 것.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는 순간이다.

 

먼발치에서 달려온 노란 영춘화迎春花가 눈 속에서 수줍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