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적선, 표류선 구분하던 해안 정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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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 동부지역 연대 현황
▲ 2004년 타원형으로 복원된 조천읍 신흥리 소재 왜포연는 미적 건축양식이 돋보이고 있다.

해안 최전방에 설치된 연대(煙臺)는 적국의 배나 민간 표류선 등 어떤 배들이 정박하고 상륙하는 지 정찰하고 각종 사변이나 위기 발생 시 연락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시대 제주성 관할 중 동부지역에는 가장 변방에 있던 종달연대를 시작으로 입두→좌가→무주→함덕→왜포→조천→별도연대→제주목에 이르기까지 약 38㎞의 거리를 두고 8곳의 연대가 횃불과 연기로 통신을 주고받았다.

이 중 무주~함덕 연대는 33리(12.9㎞)로 상응하는 거리가 가장 멀었고, 함덕~왜포 연대는 3리(1.17㎞)로 가장 가까웠다.

연대의 특징을 보면 구좌읍 종달리 해안도로에 있는 종달연대는 2001년에 복원됐다.

석축의 높이는 4.5m, 길이는 9.3m, 면적은 80㎡다. 이곳에서는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보이면서 요충지로 꼽히고 있다.

예로부터 우도와 성산에는 왜구의 침입과 이양선(異樣船·서양 선박)의 출몰이 잦았다.

종달연대는 제주목과 정의현 경계에 있으면서 1㎞ 떨어진 지미봉에 있는 지미봉수와도 교신을 했다.

입두연대는 구좌읍 평대리에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작성된 제주읍지(濟州邑誌)에는 연군(煙軍)은 모두 12명으로 2명이 한 조를 이뤄 5일마다 돌아가며 근무를 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민가가 들어서면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고,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구좌읍 한동리에 있는 좌가연대는 2005년 복원됐다. 높이 3.4m, 길이 9.8m로 이중으로 설치됐다.

들짐승의 습격을 막고 불이 민가로 번지지 않도록 방화선을 구축하기 위해 이중 방호벽을 쌓은 것이다.

좌가연대는 외벽 모서리를 직각을 내지 않고 둥글게 처리한 독특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또 불과 연기를 피우는 연소실을 복원했고, 1차 방호벽을 높게 쌓은 것이 특징이다.

무주연대는 구좌읍 월정리 일주도로에 있었다. 월정리 마을과 김녕해수욕장 중간 해안가에서 주위 지형보다 3m 높은 언덕에 있었다.

20년 전 이곳은 마을길이 포장되면서 흔적이 사라졌다. 주민들은 지금도 이곳을 ‘연대동산’ 또는 ‘연대망’으로 부르고 있다. 무주연대 역시 군인 12명이 2명씩 한 조를 이뤄 5일마다 돌아가며 근무를 섰다.

 

▲ 제주시 조천읍 함덕연대는 옛 모습을 간직하면서 축조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함덕연대는 조천읍 함덕리 해안에 있다. 복원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옛 모습이 남아 있어서 발굴조사와 보존 정비가 요구되고 있다. 2.4m 높이의 벽체와 길이가 8.4m인 네모난 석축이 현재 남아 있다.

옛 모습을 간직한 함덕연대를 통해 조선시대 연대 축조방법은 다듬은 대형 현무암으로 외벽을 쌓고 내부에는 자질한 잡석을 채워 넣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암반층 위에 연대를 세우 돼 1m 높이의 기단을 먼저 쌓고 그 위에 시설을 축조하면서 튼튼한 방어시설을 갖췄다.

왜포연대는 조천읍 신흥리에 있다. 이 마을은 과거에 ‘옛개’라고 불려왔다. 고지도에는 왜포(倭浦)로 표기됐다.

옛 마을명에 ‘왜(倭)’를 쓴 이유는 왜구들이 신흥 해안에 있는 용천수(큰물)를 길어 가거나 노략질을 하려고 자주 침입하면서 왜포라는 지명이 나오게 됐다.

왜포, 조천, 함덕연대는 다른 곳과 달리 거리가 가까운 점에 미뤄 이 지역은 방어의 요충지로 꼽히고 있다.

특히, 2004년 고증을 거쳐 복원한 왜포연대는 네모 또는 사다리꼴 모양의 일반적인 연대 구조와 달리 타원형으로 축조했다.

또 방호벽은 내벽과 외벽으로 분리해 쌓았다. 높이 2.7m, 길이 9.3m이며, 원형으로 축조돼 미적 건축양식이 돋보이고 있다.

조천연대는 조천리 조천관과 연북정이 있는 해안 북동쪽에 있다.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1702년)에는 ‘관곶(官串) 연대’라고 표기됐다.

정의현감을 지낸 김성구(1641~1707)의 남천록(南遷錄)에는 조천연대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그는 1679년 제주에 부임하기 위해 배를 타고 관탈섬을 지나 제주로 향할 때 날이 저문 무렵, 배에서 횃불을 드니 조천관 봉수대에서도 횃불을 들어 응답했다고 기록했다.

이 횃불은 조천연대에서 올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별도연대는 화북포구에 자리하고 있다. 1998년 고증을 거쳐 복원을 했고 언덕의 자연적인 지형을 따라 돌을 쌓았다.

별도연대는 제주목사가 머물렀던 관아에서도 볼 수 있는 사라봉수와 2.4㎞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 교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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