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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희 수필가

정원이 연둣빛으로 환하다.


겨우내 움츠렸던 가지마다 봄물이 올랐다. 잎과 가지로 달음질하는 생명수들의 움직임이 눈앞에 그려진다. 자두나무는 잎을 내기도 전에 하얀 폭죽을 터트리고, 자목련도 보랏빛 얼굴을 내밀며 미소를 짓는다. 지난겨울, 그토록 기다렸던 봄이다.


병실 문을 연다.


 ‘크흐윽~, 크흐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지 못하는 숨이 입천장을 맴돌다 방안에 흩어진다. “아버지!” 나지막이 불렀다. 물기가 말라버린 삭정이처럼 뻣뻣하게 누워있는 아버지. 거친 숨소리가 대답을 대신한다.


호흡을 위해 벌린 아버지의 입이 바싹 말랐다. 거즈를 적셔 혀와 입안을 닦고 입가에 젖은 거즈를 올려놓는다. 물 한 방울 삼키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수시로 올려놓은 거즈의 물기가 생명의 물길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밤을 무사히 넘긴 아침이다.


하늘이 잔뜩 움츠리고 낮게 내려앉아있다. 유리창을 가득 채우던 한라산은 잿빛 하늘에 가려 희미한 실루엣만이 형체를 짐작케 한다. 회진 온 의사가 밤을 넘기기 힘들겠다며 병실을 나선다.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의사의 건조한 말과 뒤범벅이 되어 침대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입에 달고 살았다. 외출했다 집에 들어설 때도 ‘아버지’를 부르며 현관문을 열었다. 배가 고파도, 자랑할 일이 생겨도 제일 먼저 찾는 이름이었다. 그럴 때 마다 “아이고, 내 딸 왔구나!” 하며 맞아주는 그 말이 나는 좋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던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정류장을 몇 번씩 오가며 주말마다 나를 기다렸다. 간혹은 내가 탄 버스가 오는 것을 확인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숨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아버지를 놀라게 하려고 느닷없는 방문을 하거나 짓궂은 장난을 일삼았다.


겨울밤에는 당신의 손으로 차가운 내 발을 녹여주었다. 발이 따뜻해야 숙면한다며 밤새 내 발을 주무르던 아버지.


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는다.


눈을 감은 채 말 한마디 못하는 아버지가 이상하리만치 아귀에 힘을 주고 있다. 나는 아무 말도, 대답도 할 수가 없다. 무슨 말이든 건네면 아버지가 금방이라도 내 손을 놓아 버릴 것만 같다. 퉁퉁 부은 아버지의 손에 가만히 내 얼굴을 묻는다.


아버지의 상태를 체크하는 기계가 이상하다.


거칠게 내뱉던 숨소리가 잦아들자 맥박과 혈압수치가 뚝뚝 떨어진다. 단 몇 초, 아니 한 순간이다. 바쁘게 굴곡을 그리던 기계장치의 파형이 길게 한일자를 그린다. 크고 작은 파동을 이어가던 장치에 오류가 생겼는지, 길게 늘어진 직선은 더 이상 조급해 하지도 않고 느긋하기만 하다.


“아버지~이!”, “아버지~이!”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가 자꾸만 흔들린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얼굴과 기계 장치의 화면을 번갈아 살피는 내 눈이 뿌옇게 흐려진다.


호출을 받고 달려온 의사에게 온 몸의 촉수가 곤두섰다. 


“운명하셨습니다.”


숨조차 내 쉴 수 없던 긴장과 침묵이 일순간 깨져 버린다. 나의 태산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밤은 새벽을 향해 가고 있다. 


한복을 입고 누워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벼워보인다. 비로소 나는 아버지의 귓가에 참았던 말을 꺼내 놓았다.


“잘 가요, 아버지.”


입원하고 며칠이 지나면서 부터 아버지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신발과 옷을 찾으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때, 어쩌면 이미 이승의 집이 아닌 당신의 본향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생자필멸, 우주의 원리에 순응하고 있었는지도.


생명이 시작된 그 곳으로의 귀가는 얼마나 멀고 긴 여행일까. 이제 곧 아버지의 백일 탈상일인데 어디쯤 가고 계신지….


마당 가득 진동하는 봄 냄새가 지독한 허기를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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