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을 딛고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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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영 수필가

슬픔이 너무 크면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일까.

짙어 가는 그리움을 안으로 삭이면서 지낸 침묵의 세월, 아버지의 숭고한 교육정신은 내 가슴에 스러지지 않는 별빛으로 남아, 지난 나의 35년 교단 생활을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셨다.

긴 세월 속에서 아버지의 교육 사랑의 빛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안타깝더니, 십여 년 전 ‘교육제주’의 특별기획으로 ‘근·현대 제주교육인 열전’에서 그 빛을 세상에 내비치였을 때, 그래도 세상은 따뜻하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회고담을 써 주신 분들께 감사했었다.

여섯 살 나던 해에 시대의 아픔은 어느새 와 있었다.

제주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가 4·3사건으로 돌아가시자, 우리 가족은 친할아버지의 부름을 따라 고향인 애월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판사이던 외숙부가 적극 반대했으나 어머니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집안을 개화시킬 것이라는 아버지의 기대와 믿음을 저버릴 수 없는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을까, 큰며느리 역할과 다섯 자녀를 키워야 하는 44세의 홀로 인생이 시작되었다.

가족의 불운은 다시 시작되었다.

제주도 최초 교악대를 창단(1947년 애월중, 1949년 제주중)하며 음악교육에 열정을 쏟던 큰오빠가 4·3 사건 2년 후 몰아친 예비검속에 끌려가 행방불명, 20대 청춘이던 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어머니의 슬픔은 오죽했으랴. “집안의 주춧돌이 무너졌다.” 어릴 적 내 가슴에 박혀 있는 그 통곡의 소리는 어른이 되면서 더욱 나를 슬프게 하였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노래로 채워주던 오빠였다. 4학년 글짓기 시간, 제목은 ‘우리 가족’이었다.

큰오빠에 대해서도 몇 줄 썼다. 뒷날 담임선생님이 어머니를 찾아와, 다시는 그런 글을 쓰지 않도록 주의 시켜 달라는 부탁을 하고 갔다. 어머니는 나에게 뭐라고 썼는지 자세히 말해보라고 다그쳤다.

“큰오빠는 나쁜 사람이 끌고 가서 바다에 던졌다고?.”

“응, 잘 썼다. 순경? 무서워 할 것 없다.”

모두를 쉬쉬하며 숨죽이고 살던 시대다. 하지만 어머니는 남편과 큰아들을 잃었는데 더 이상 비참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며 매사에 당당히 나섰다.

가족의 아픔은 계속 이어졌다.

초등학교 강사로 있던 둘째언니가 연좌제에 걸려 정식발령이 무너졌을 때 한숨을 내쉬던 체념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성이 박 씨인 어머니의 별명은 ‘박순천 여사’다. 당시 바른 소리를 잘하던 한 야당 국회의원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국가 정책 사업인 문맹퇴치 운동에 앞장서서 부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못마땅한 정책에는 쓴소리도 잘하였다. 외롭고 힘든 삶을 거뜬히 이겨내다가 78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우리 네 자매는 자주 만난다.

서울에서 살던 큰언니가 제주로 내려오자 더욱 화기애애, 지나간 날의 역경을 들추어내지 않는 언니들의 표정에서 한세상을 보낸 여유로움을 본다. 어머니와의 좋은 추억만 간직하고 싶은 마음들이다. 그렇다. 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소망도, 지난 시대의 아픔을 떨쳐버리고 웃음으로 만나는 우리들의 평화로운 모습일 것이다.

지난 6월 25일 ‘북부예비검속희생자위령제’에 참석했다.

4·3사건, 예비검속, 연좌제 등으로 이어지는 가족의 아픔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삶을 헤쳐나가신 어머니를 불러보는 수필을 낭송하였다.

서러움과 그리움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던 날, 내 마음속에 흐르는 눈물처럼 하늘에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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