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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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수필가

‘삶은 선택’이라는 저서나 주장은 많다. 운명론이나 결정론에 맞서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방식이며 태도란 내용들이다.

반면 모든 인간사(人間事)는 본디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은 샤머니즘(shamanism)이나 일부 종교의 교리로 형성되기도 했지만 니체의 ‘영원회귀(永遠回歸)’라는 철학 사상에 의해 그 기초가 다져졌다고도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생(生)은 원의 형상을 따라 영원히 반복되는 것. 현재의 이 순간이 과거와 미래를 응축시킨 영원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삶은 선택’이라는 주장이나 니체의 ‘영원회귀’ 관(觀)을 들여다보면 삶의 선택은 지고 지난의 문제다. 지금의 선택이 내 생을 지배하거나 ‘영원회귀’한다면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그러함에도 우리의 삶은 이런 엄중한 삶의 선택을 너무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결정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어린 시절은 부모나 보호자의 선택에 의해 삶이 결정되어 버리고, 성장해서는 세파 따라, 기분 따라 쉽게 결정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 역시 운명론적 시각에 맞서는, 운명은 선택하는 것이란 의미다.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도 선택의 결과라 할 수 있으니 선택이야말로 얼마나 엄중한 행위인가. 인생의 동반자로 서로 힘을 보태며 살아가려던 친구나 쌍둥이 형제마저도 어느 순간 선택을 달리하여 상반된 삶을 살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나 문학작품을 쉬 접한다. 우리 주위의 삶의 현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와 대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삶의 선택이 인생의 운명을 갈라놓음이다.

국가의 운명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

조선의 패망 원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패망 원인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제기될 수도 있지만 당파싸움과 국론 분열, 관료의 폐단과 신분·지역·성 차별로 간추려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원인은 당파싸움이었다.

조선의 사색당파는 서로 죽고 죽이는 당쟁으로 날을 새고 해를 넘겼다. 다른 당파의 의견은 무조건 반대하였으며, 아무리 우수한 인재도 당파가 다르면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위정자들의 안중에는 나라와 백성보다는 사리사욕이나 당리당략이 우선이었으니 국정은 당쟁에 매몰되고, 백성의 삶은 피폐했다. 망국의 화를 자초하고 만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 현실에서도 조선의 패망 원인이었던 악폐들이 엄연히 답습되고 있다. 당파싸움이 그렇고, 국론분열이나 지역갈등, 관료사회의 폐단도 여전하다. 우리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 또한 그 시대나 별반 다름이 없다. 국가 존립이 위태로워 보인다. 이런 위난 또한 우리가 초래한 것이니 그 해법도 우리가 찾아야 한다.

일전에 정치인이 지녀야 할 매력 키워드는 ‘품격·공감·국익’이란 기사를 보았다. 화해정책으로 품격의 정치를 실현한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 ‘나’보다는 ‘우리’라는 표현으로 시민과 공감을 얻으려 노력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 국익을 위해서는 반대당의 정책도 과감히 수용하는 메르켈 독일 총리를 그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꼽았다.

우리의 정치 품격은 우리 자신의 품격이기도 하다. 우리도 이제 선동이나 포퓰리즘으로 국민을 우롱하거나 유권자를 현혹하려는 품격 낮은 꼼수 정치를 냉정히 비판하고, 당리당략보다는 국리민복에 헌신할 품격 있는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 자신이 뽑아 놓고, 제 눈에 핏발을 세우며 비토(veto)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영원회귀’의 차원에서도 후회하지 않을 현명한 선택의 참정권을 행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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