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견고한 성 구축...동부지역 최대 군사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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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넘보는 왜구 차단위해 구좌읍 하도리에 축성
▲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축성된 별방진성은 지금까지 잘 보존되면서 조선시대 성 쌓는 방법과 규모를 알 수 있는 주요 문화재로 꼽히고 있다.

조선시대 제주 동부지역 최대의 군사기지는 별방진(別防鎭)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김녕방호소가 있었고 마병과 보병 153명이 배치됐으나 성을 쌓지 않아서 적의 침입에 방어가 어려웠다.

1510년(중종 5) 장림 제주목사는 우도에 왜구가 접근하기 쉬우므로 이를 방어하기 위해 김녕방호소를 구좌읍 하도리로 옮기고 성을 쌓았다. 별방(別防)은 하도리의 옛 지명이다.

별방진성은 축성 당시 성 둘레가 2390척(724m), 높이 7척(2.3m)이었다. 1848년(헌종 14) 목사 장인식이 보수를 하고 중축을 하면서 현재 성 둘레는 1008m, 높이는 3.5m에 이르고 있다.

성을 쌓을 때 흉년이 계속 들어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식량이 모자라 인분까지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동·서·남문 등 3개의 성문 위에는 누각이 있었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관아 건물)·객사(客舍·관아 부속건물 겸 숙소), 군기고(軍器庫·무기고), 별창(別倉·창고) 등의 시설물이 들어섰다. 성 북쪽에는 배와 무기를 제조하던 대변청(大變廳)이 있었다.

하도리 해안가에 있는 별방진성은 동쪽과 북쪽이 바다를 마주해 있었고, 북쪽 수로에는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도내 진성(鎭城) 가운데 규모가 컸고, 병력도 가장 많이 배치됐다. 성곽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까지 성벽이 많이 남아 있어서 조선시대 성 쌓는 방법과 규모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로 꼽히고 있다.

고영철 향토사학자는 “손가락이 들어갈 구멍조차 없을 정도로 별방진성은 정교하고 든든하게 축성됐다”고 말했다.

김상헌의 남사록에는 “별방성은 동·서·남에 3개의 문이 있고 우물이 있으나 해변에 있어서 매우 짜다. 중앙에는 객사, 별창, 군기고가 있다”고 기록했다.

주둔 병력은 지휘관인 조방장(助防將·종9품 무관직) 1명, 치총(稚摠·성문을 지키는 우두머리 장령) 4명, 성정군(城丁軍·성곽 방어부대) 510명, 유직군(留直軍·성 안을 지키는 군졸) 148명, 서기(書記) 15명 등 총 678명이 배치됐다.

 

▲ 제주 동부지역 최대 군사기지였던 별방진성 안에 있는 하도리 마을은 집집마다 높은 돌담을 쌓은 게 독특하다.

별방진은 입산·왕가 봉수 2곳과 무주·좌가·입두 연대 3곳을 관장했다.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 이형상은 이곳의 방어 실태를 점검하는 ‘순력(巡歷)’을 실시했다.

이 장면은 탐라순력도 기록화첩에 별방조점(別防操點)으로 남아있다. 별방진 수비대장은 김여강으로 성정군 423명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성 위에 있는 목장에는 흑우 247마리, 말 946마리가 사육됐고, 마소를 관리하는 목자(牧子)와 보인(保人)은 187명이 있었다. 창고에는 군량미 2860섬이 보관돼 있었다.

군대의 기강을 점검한 이형상 목사는 “밤에 군사훈련을 할 때 장대(將臺)에서 호각소리를 내면 성안의 남녀노소가 지체 없이 성에 올라와 방어의 면밀함을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별방진성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각 도의 병영·수영·진영 등 병영 혁파와 하도리 포구 공사에 성돌이 쓰이면서 일부가 훼손됐다. 1974년 지방문화재(도 기념물 24호)로 지정된 후 옛 북제주군은 1994년 허물어진 성벽을 복원했다.

하도리 마을을 견고하게 감쌌던 별방진성은 대기근과 과중한 부역, 왜구의 침탈로 삼중고에 시달렸던 백성들의 피땀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은 하도포구와 연계해 역사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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