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 세계사의 주인공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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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고려인들이 사는 우즈베키스탄의 시골에 가면 할머니가 어린 손자, 손녀들과 씨름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늙고 병약한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힘겹게 아이들을 돌보는 경우도 있었다.

마을의 젊은 고려인들은 대부분 한국에 갔다고 했다. 젊을 때 돈을 벌어야 하니까 엄마, 아빠는 한국에 가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겨진 것이요. 젊은 엄마, 아빠는 두고온 가족을 생각하면서 지금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사실을 현장에서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을 때, 좀 안 되었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이런 아이들에게 이런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까지 우리 교회에 다니다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간 젊은 부부가 있었다. 5년 전 그 곳을 떠나올 때, 그들은 30대 후반이었고 아이들은 10대 초반이었다. 열살 전후의 아들 둘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그들은 떠나왔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 가족과 친지들이 그 집에 모여 이야기하고 위로하느라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힘겹게 사내 아이들을 키웠다. 그런데 얼마 없어서 심한 관절염 때문에 할아버지가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리고 당뇨병으로 할머니는 앞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돌봄을 받던 아이들이 이제는 돌보는 입장에 서기 시작했다. 어린 사내 아이 둘이서 걷기 힘든 할아버지와 앞이 안보이는 할머니를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 부부는 나에게 처음 한국으로 떠나갈 때는 부모님이 우리 아이들을 돌보았는데, 지금 돌아와서 보니까 아이들이 병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참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서울 강남에 사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조금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아이들은 좋은 환경에서 잘 사는데 이 아이들은 참 안되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세계사의 미래는 이런 아이들의 것이 아닐까? 이런 아이들이야말로 다음 세대 세계사의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어려서 부모가 멀리 떠나는 경험을 했다. 부모가 멀리 가 있는 동안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집을 지켜야 했다. 할머니가 앞을 못보고 할아버지가 걷지 못할 때는 아이들이 일을 해야 했다. 인생살이의 어려움, 가족관계의 소중함, 삶의 깊은 관계와 의미에 대하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일찍 눈을 떴다. 자신이 살아갈 인생에 대하여 진지하게 스스로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어려서 그런 단련을 받은 아이들은 어디서 어떤 삶을 산다 해도, 자신의 삶을 잘 꾸려 갈 것이라 생각했다.

사회적 환경이 중요하고, 국가적 배경도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 해도 앞으로 걸어가려면 건강한 자신의 두 다리가 필요하다. 마음에 밝은 희망이 있고 또 건강한 두 다리가 있는 젊은이에게 세계사라는 드라마는 주인공의 배역을 맡기려 하지 않을까?

그들이 가고오는 무대 배경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그런데 그 넓고 거친 무대를 견고하고 붙들어맨 그 가족관계, 그들이 품고 살아가는 희망은 너무나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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