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중기에 축조된 조천진성은 타원형의 성곽 형태가 잘 보존돼 있는 유적으로 꼽히고 있다. 성문 위 누각은 임금을 사모한다는 의미로 연북정이라 명명됐다.

조천포는 예로부터 제주의 해상 관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화북포와 더불어 조정에서 파견된 중앙관리인 경래관(京來官)이 드나들었고, 조공으로 바치던 말이 반출됐던 2대 교통항 중 하나였다.

교수(敎授) 곽기수의 중창기(重創記)에는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풍향을 관측하는 곳이어서 조천(朝天)이라 이름이 붙여졌다”라고 기록됐다.

조천진성은 제주를 지키던 9진(鎭)의 하나로, 조선 초기부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군대의 감시초소인 방호소와 수전소(해군기지)가 있었던 방어의 요충지였다.

처음 축조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1590년(선조 23년) 이옥(李沃) 목사가 성곽 일부를 개축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그 이전에 축조됐음을 알 수 있다.

이옥 목사는 “조천에 관(官)이 있는 것은 도적들로부터 길목을 지켜야하는 요충지이며, 왕명을 받는 곳인데 성이 좁고 노후하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개축해야한다”고 명했다.

이 명을 받들어 전부장(前部將·선봉장) 서만일이 농한기를 이용해 역군을 동원했고 그해 10월에 착공, 3개월 만인 12월에 공사를 마쳤다.

조천포구에 개축된 조천진성은 둘레 428척(146m), 높이 9척(2.7m)으로 9진(鎭) 가운데 가장 작지만 짜임새 있게 성을 축조했다.

남·북·서 삼면의 바다로 둘러싸인 타원형의 성곽으로 동쪽 한곳에만 성문을 냈다.

바닷물이 물러가면 동문(東門)에는 땅과 연결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거교(擧橋)를 설치했다.

성 내에는 객사인 조천관, 군기고, 마굿간 등이 들어섰다. 동문 위에는 망루를 세워 쌍벽루(雙碧樓)라 했다.

‘쌍벽(雙碧)’은 청산도 푸르고 녹수도 푸르러서 쌍쌍이 푸르다는 의미로 즉, 한라산과 푸른 바다가 서로 마주 보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

1599년(선조 32) 성윤문 목사는 쌍벽루를 보수해 북녘에 있는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연북정(戀北亭)’이라 새로 개칭했다.

유배되어 온 사람들은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임금에 대한 사모와 충정을 보내기 위해 ‘연북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연북정은 1971년 제주도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됐다.

1702년(숙종 28) 10월 29일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 이형상은 조천진을 순시했다. 이 장면은 탐라순력도 기록화첩에 조천조점(朝天操點)에 묘사됐다.

조천진의 지휘관은 조방장(助防將·종9품) 김상중으로 휘하에 성정군 423명이 있었다.

조천진은 서산 봉수와 조천·왜포·함덕 연대를 관장했다. 목장에는 말 505필과 이를 관리하는 목자(牧子) 87명이 있었다.

그림 윗부분에는 말을 점검하기 위해 설치된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이 보인다. 원장은 우마(牛馬)를 모아 놓기 위해 만든 원형 목책이며, 사장은 우마를 한 마리씩 통과할 수 있는 좁은 목책 통로다.

이는 우마의 숫자를 파악할 때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 한 마리씩 붙들 수 있게 한 장치다.

조선 중기 이후에 축조된 조천진성은 지금은 둘레 128m, 높이 2.2~4.3m, 폭 1.6~3.1m의 성곽 대부분이 잘 보존돼 방어시설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꼽히고 있다.

제주시가 지난해 5억원을 들여 1962㎡의 내성 터에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그대로 조천관과 군기고 등 건물의 주춧돌이 나왔다.

조천진성은 다른 진성에 비해 성문이 하나 밖에 없고 삼면의 바다로 둘러싸인 독특한 입지 조건을 갖춘 성이다. 연북정과 조천포를 아우르며 제주 역사의 발자취가 온전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