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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윤/수필가

별들이 내려온다.


빨강 초록 파랑 노랑, 둥글게 반짝이며 쏟아져 내린다. 억새풀이 되었다 나이아가라폭포가 되기도 하며 흩어진다. 서울동물원의 별밤축제가 한창이다. 섭씨 35도를 넘는 더위에 동물들도 지친 듯 기척이 없는데 축제에 참가한 아이들의 환호성이 밤하늘을 덮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동물원 입구를 향해 걸어 저수지에 다다랐다. 하늘에도 저수지에도 온통 적막뿐이다. 밝은 달빛 속에서 저수지 물위에 G선상의 아리아가 어둠을 토닥이며 흐른다.


동물원과 서울랜드를 오가는 마지막 코끼리열차가 고요를 흔들며 들어왔다. 열차가 멈추자, 별빛이 내려와 앉은 듯 반짝이는 얼굴로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응석을 부리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가볍다. 사람들이 빠져 나간 텅 빈 자리에 어둠이 몰려오자, 3년 전 아우슈비츠에 갔을 때 유대인들의 희망을 죽음으로 바꾼 녹슨 철길 풍경이 떠올랐다. 철길에는 죽음의 공포와 절망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던 사연들이 철로 안팎에서 뒹구는 자갈 하나하나에 스며있는 것 같았다.


공포의 한가운데서도 희망의 씨앗들을 심었을 붉은 벽돌의 수용소 건물을 바라본다. 인간의 편견과 욕망의 집합체인 전시실에는 이름이 적힌 가방과 빛바랜 편지들, 배냇 양말, 노인들의 틀니, 의수와 의족을 모아 놓은 곳들도 있다. 수북하게 쌓인 안경테, 머리칼로 만든 옷들, '죽음의 천사' 요제프멩겔레의 생체실험 대상자의 사진…. 더구나 아이들의 신발더미에서는 자유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을 어린 영혼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어머니의 외침과 기도소리가 벽을 뚫고 새어나올 것 같다.


“일하면 자유로워진다.”(Arbeit Macht Frei)는 슬로건이 양각된 아취형 정문을 나서는데 새떼들이 비를 피해 플라타너스로 날아간다. 새들의 피난처가 된 플라타너스는 인간의 영욕(榮辱)과 아비규환(阿鼻叫喚)을 목격한 증인들이 아닌가. 온 종일 내리는 비에 마음도 젖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예루살렘 동북부의 야드밧셈 홀로코스트박물관을 찾았다. 추모탑과 꺼지지 않는 불꽃, 22개의 전시관 등을 지나 도서관에 이르자 학살당한 사람들이 수용소로 올 때 탔던 열차번호와 수인번호 등의 사료들이 비극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어린이 추모관은 유대인으로 태어났기에 죽어야 했던 노란 별들을 기리기 위해 동굴을 파서 만든 것이다. 칠흑처럼 어두운 전시실 안으로 들어서자, 엄숙한 공간에 촛불들이 거울 벽에 반사되어 은하수를 이룬다. 별들은 수용소, 가스실과 생체실험실에서 죽어간 150여 만 명의 어린이들의 눈빛인 것 같다. 어디선가 이름 나이 출생지를 들려주는 소리는 메아리 되어 가슴을 친다. 나치스트들은 저 별들의 영혼과 미래를 앗아갔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나는 지금 여기서 이름을 부를 때마다 깨어나고 있노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독일의 이짝 골드스타인, 오스트리아의 사라 코헨, 홀란드의 안네 프랑크….”


안네 프랑크는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끌려가 굶주림과 발진티푸스로 생을 마감한 소녀가 아닌가. 그녀의 일기에서 “난 믿어, 인간은 본래 선(善)하다는 것을.” 그 무엇이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까지도 선하다고 믿게 했을까. 동굴을 나오자 햇빛에 눈이 부시다. 탑에 새겨져 있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글귀가 마음을 붙든다.


어린이 기념관을 나와 정문으로 발길을 옮기다 〈코르차크와 게토아이들〉 조각상을 마주했다. 바르샤바의 〈고아의 집〉에 머물던 유대인 아이들이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끌려간다. 코르차크는 가스실 앞에서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아이들을 감싸 안는다. “내 사랑하는 아이들아, 선생님은 너희들과 끝까지 함께 할꺼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스승은 제자들의 손을 꼬옥 잡고 앞장서서 가스실 안으로 들어간다.


“나의 집, 나의 울안에 그들의 송덕비를 세워 주리라…. 그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주리라.”(이사야56:5)는 구절이 새겨진 야드 밧셈의 정문을 나오면서 나는 깊은 생각에 젖는다.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지를. 인간의 내면에는 수많은 히틀러와 코르차크가 잠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이스라엘 셰마를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빅터 프랭클의 말이 슬픈 울림으로 다가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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