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조선시대 서귀포 중심지였던 '서귀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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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폭포 물을 끌어다 식수 사용...발굴과정에서 발견
▲ 서귀포진성 내에 있는 집수정은 정방폭포 상류의 물을 끌어와 식수로 보관했던 곳으로 옛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다.


1300년(고려 충렬왕 26년) 제주도의 행정구역은 동도(東道)와 서도(西道)로 나뉘었고 14개 현이 설치됐다. 이 중 홍로(烘爐), 예래(猊來) 2개 현이 오늘날 서귀포지역에 해당된다.

군대의 감시초소인 서귀포방호소는 서홍동 천지연폭포 상류인 홍로천에 있었다.

1439년(세종 21) 한승순 제주목사는 잦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방호소에 성을 쌓았다.

1590년(선조 23)에는 이옥 목사가 옛 서귀포구 동쪽(현 송산동 해안)으로 위치를 옮겨 서귀진성을 축성했다.

성 밑 포구는 넓고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수백 척의 선박을 감춰둘 수 있던 요충지였다.

성 둘레는 825척(250m), 높이 12척(3.6m)으로 동문과 서문이 있었다.

축성 당시 성 주변에는 어촌 마을 몇 호만 있었다. 이에 따라 제주목사는 주변에 있던 폐쇄된 목장을 나눠주며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 또 조 8석 지기에 한해 영구히 감세 조치를 해주면서 백성들이 떠나지 않도록 했다.

병력은 지휘관인 조방장 1명, 성정군(城丁軍·성곽 방어부대) 132명, 유직군(留直軍·성 안을 지키는 군졸) 9명이 있었다.

▲ 제주도기념물 55호로 지정된 서귀진성 전체 전경

서귀진성은 삼매양·예촌·자배 등 3개 봉수와 연동·보목·우미·금로포 등 4개 연대를 관장했다. 봉수·연대에는 84명의 봉수군이 있었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관아 건물), 객사(客舍·관아 부속건물), 진졸청(鎭卒廳·병사용 건물), 무기고, 창고, 사정(射亭·훈련장) 등이 있었다.

또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정방폭포 원류인 정모연(正毛淵)에서 이곳까지 1㎞에 이르는 물길을 여는 관개수로를 설치했다.

병사들은 성 동쪽 아래에 구멍을 뚫어 집수정에 물을 채워 넣었다. 사용하다 남은 물은 성 서쪽 밖으로 내보내 백성들이 논농사를 짓도록 했다.

2010년 서귀진 발굴조사에서 집수정은 바닥이 목조로 조립됐고 수로는 잡석을 쌓아 만든 것으로 나타났다.

발굴된 수로 위에는 돌 덮개를 씌워 군사들이 활동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했다. 사각형의 집수정은 정교하게 축조돼 현재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 1702년 탐라순력도에 나온 서귀진 객사 건물터 모습.

1702년(숙종 28) 이형상 목사는 서귀진의 군기를 점검하면서 기록화첩에 서귀조점(西歸操點)을 남겼다.

당시 조방장은 원덕전이었고 수하에 68명의 성정군이 있었다. 말은 237필이며 이를 돌보는 목자(牧子)와 보인(保人)은 38명이었다.

영주 12경 중 서진수성(西鎭壽星)은 이곳 서귀진에서 춘분과 추분에 남쪽 하늘 끝에서 무병장수의 별인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원조 목사는 1841년 가을에 자신이 직접 관측한 것을 토대로 노인성의 위치를 탐라록에 기록했다.

서귀진성은 일제시대 기와 건물과 성담이 남아 있어서 일본군이 활용했다. 4·3이 일어나자 성담 일부를 헐어 마을 방어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시대부터 서귀포의 군사·행정·치안의 중심지였던 서귀진 터는 일제시대 정의공립보통학교, 서귀공립심상소학교 등으로 사용됐다.

광복 이후에는 제주감찰서 서귀포지서, 남제주군 교육구청에 이어 서귀여중이 들어섰다.

2012년 서귀포시는 제주도기념물 55호로 지정된 서귀진 유적지 7895㎡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 성벽과 집수정 등을 정비했다.

발굴 당시 정방폭포와 연결된 관개수로가 발견돼 400여 년 전 서귀포 백성들이 정방폭포의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는 문헌기록과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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