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북진성 중 남아 있는 서쪽 구간 성벽 모습. 1555년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된 후 온 1678년 성을 축조했다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화북포(浦)는 조선시대 내륙을 잇는 통항로이자 해상 관문이었다. 추사 김정희와 면암 최익현이 유배를 올 때 이곳으로 도착했다.

육지와 직선으로 뱃길이 연결된 화북포는 사람과 물자가 수시로 드나들었고, 해군기지였던 화북수전소가 설치됐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따르면 화북수전소에는 판옥선이 중부·좌부·우부에 각각 1척이 있었고, 노를 젓는 격군 180명, 포를 쏘는 사수 87명이 있었다.

문헌에는 바윗돌이 날카롭고 태풍이 많아 판옥선 운용이 쉽지 않다고 적었다.

1555년(명종 10) 왜구의 침입으로 화북수전소는 함락됐고, 이곳으로 상륙한 왜구는 제주성을 3일간 포위하기도 했다.

이후 수전소를 방어할 성을 쌓게 됐다. 1678년(숙종 4) 목사 최관이 축성한 화북진성은 둘레 606척(183m), 높이 11척(3.3m)으로 동문과 서문이 있었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관아 건물), 공수(供需·부엌 겸 곳간), 사령방(使令房), 마방(馬房) 등 건물이 들어섰다.

왕명을 받든 경래관(京來官·중앙관리)을 접대하거나 환송하기 위해 1699년(숙종 25) 남지훈 목사는 3칸의 객사인 환풍정(喚風亭)을 건립했고, 북성 위에는 망양정(望洋亭)을 두었다.

병력은 조방장 1명, 치총(우두머리 장령) 2명, 성정군(육군 수비부대) 156명, 유직군(병졸) 128명, 서기 12명 등 총 299명으로 별도연대를 관할했다.

1734년(영조 11) 김정 목사(1670~1737)는 화북포가 얕고 비좁아 배가 파선되고 선박 왕래가 불편함에 따라 축항공사를 벌였다.

쌀 300석과 1만명의 인부를 동원해 길이 63m, 높이 4m의 방죽을 쌓았다. 김정 목사도 등짐을 지어 나르며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선착장에는 영송정(迎送亭)을 지어 선박 출입의 검문소로 이용했다.

김정 목사는 임기를 마치고 제주를 떠나기 위해 화북진성에 머물던 중 과로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

당시 모든 관민이 슬퍼했다. 그의 선정비는 120년 뒤인 1857년 화북포구에 세워졌다.

화북진성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각 도의 병영·수영·진영 등 병영 혁파로 성 기능을 상실했다.

1926~1971년까지 화북초등학교로 사용됐고 지금은 화북 청소년문화의 집이 들어섰다.

현재 북쪽과 서쪽의 성벽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다른 곳은 허물어진 상태다.

제주시는 2011년 지방문화재(도기념물 56호)인 화북진성을 정비·복원할 계획을 수립했으나 성 주위로 도로와 주택이 들어서면서 사유지 매입이 어렵게 됐다.

또 성터 부지는 제주도교육청이 공유재산으로 소유하면서 복원사업이 중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