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5년 5월 왜구는 전남 해남군 달량포로 침입해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습격했다. 출병한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은 왜구에 포위돼 전사했다.

전주부윤 이윤경의 구원병에 의해 왜구는 물러갔지만 본거지로 돌아가지 않고 제주도로 방향을 돌렸다.

1555년 6월 27일 60여 척의 배에 나눠 탄 왜구 1000여 명은 제주의 관문인 화북포로 침입했다.

화북수전소를 점령한 이들은 남수각 동쪽 언덕에 진을 치고 제주성을 3일간 포위했다. 김수문 목사와 이선원 판관이 지휘하는 관군은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맞서 미천한 신분이었던 갑사(甲士·직업 군인) 김성조 등 효용군(驍勇軍·용맹스런 군인) 70명이 적진으로 돌격해 왜구에게 타격을 가했다.

정병(正兵) 김몽근은 붉은 깃털을 단 투구를 쓴 적장을 활로 쏘아 넘어뜨리자 왜구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김수문 목사는 군관 강려에게 명령해 바다로 쫓겨 가는 왜선을 대포로 공격했다. 왜구들은 물에 빠져 죽었고, 살아있었던 54명은 목을 베 수급을 얻었다. 또 적선 6척을 포획했다.

명종은 제주성을 지켜낸 목사와 판관의 품계를 올려주고 군관 강려를 대정현감으로 승진시켰다.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왜구를 추격해 큰 공을 세운 김성조는 종3품 건공장군(建功將軍)이라는 파격적인 벼슬을 제수했다.

한편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 왜구 침입의 위험성과 방어 상의 문제가 드러났지만 조정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로 인해 37년 후인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요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