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8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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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선/수필가

바람이 분다. 산책을 하기에 참 좋은 날이다. 이른 봄의 산책길은 겨울의 매서움과 봄의 부드러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매력이 있다. 한라산을 향해 삼사십 분 남짓 걷다가 바다를 보며 다시 내려오는 길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걷는 길에서 운이 좋으면 동백꽃에 앉아 꿀을 빨고 있는 새를 만나기도 한다. 가끔씩은 발아래 제비꽃이 나타나 놀라기도 하고 아는 척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말의 재롱은 덤이다. 날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익숙한 길을 낯선 길처럼 걷는다.


집 주변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았다. 솔향기를 실은 바람이 불때면 어김없이 소금기 빠진 맑은 파도소리도 따라왔다.


그 날은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가을 오후였다. 바람에 이끌리듯 나선 산책길에서 이름표를 달고 서있는 소나무를 만났다. 붉은색으로 커다랗게 숫자를 써놓아서 가까이 가지 않아도 읽을 수 있었다.  ‘나무에 웬 이름표람’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하늘과 들꽃들에 마음을 빼앗겨 한 시간이 훌쩍 지날 때까지 걸었다. 이틀 후 다시 나선 그 길에서 만난 것은 반듯하게 잘려 누워있는 소나무였다. 나무가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는 밑동에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4418’이라는 숫자와 그 나무를 자른 사업체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었다. 그 앞에 멍하니 주저앉아 잘려나간 소나무의 속살위에 손바닥을 대어보았다. 촘촘한 나이테위에 송진이 피처럼 번져 있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미지근한 기운이 전해온다. 손을 들여다본다. 톱밥과 송진이 묻어있는 손에서 솔 향이 난다. 그곳을 지나다니면서도 무심하게 스치고 가서 미안했다. 하늘과 교신을 하듯 뻗어있던 수많은 초록의 안테나들이 자꾸만 땅을 향할 때부터 알아봤어야했다.

 

윤기 없는 솔잎들이 바람에 떨어져 나갈 때 인사를 나누어야했다. 그 해 내내 전기톱소리가 날 때 살아있는 나무들을 안아주어야 했다. 옆에는 토막을 낸 소나무가 가지런하게 쌓여있었고, 이웃한 멀구슬나무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고 있는 듯 유난히 꺼칠했다. 소나무는 하늘과 소통하는 것을 마치고 땅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을 하루 종일 나무들이 울었다. 소나무의 비명소리는 나의 잠자리까지 따라 들어왔다.


시숙의 입원소식을 듣고 찾아간곳은 한 종합병원이었다. 병실의 호수를 잊어버릴까봐 입으로 되뇌고 또 되뇌였다. 퀭한 눈에는 생기가 사라지고 물이 마른 나무처럼 살이 빠져 있었다. 그의 몸은 흙바람을 맞은 듯 온통 푸석푸석했다. 무엇이 그의 생명을 유지하는 통로를 막고 있는 것일까. 나는 애써  “아주버님. 햇볕을 덜 봐서 그런지 피부가 맑아 지셨어요.” 하며 목소리를 밝게 내었다. 시숙이 싱긋 웃었다. 두 번째 병문안을 갔을 때 언뜻 아버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돌아가시기 전의 아버님의 얼굴이 왜 시숙에게서 느껴졌는지 불안했다.


“요즘 한라봉이 맛이 있으려나…….”


평소에 과일을 입에 대지도 않던 사람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드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보내겠다는 말에 다시 한 번 싱긋 웃는다. 시숙은 제주에서 보낸 과일을 간호사들에게 나눠주고는 하늘로 돌아갔다. 쉰여덟 해의 역사가 담긴 유골함을 네모난 작은 공간에 모시면서 모두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도 햇볕이 들고 밖이 보이네.”


누군가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시숙의 또 다른 집은 작은 창 아래 적혀있는 숫자를 기억하지 못하면 찾기 힘들다.


바람이 분다. 흙바람이다. 초록빛의 솔바람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꺾여버린 안테나로는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들려 줄 수가 없다. 가끔 서걱대며 뒤척이는 마른 억새의 소리만 들릴 뿐이다.
어금니가 빠져 나가버린 그 길을 다시 걷는다. 멀구슬나무는 봄을 감지했는지 물을 뿜어 올려 제법 푸릇하다. 맞은편 동산에는 작은 소나무 하나가 기세 좋게 기지개를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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