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해상진출 및 방어 교두보 마련한 진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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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진성, 수산진성...지금은 학교 울타리로 사용
▲ 제주시 애월읍 애월초등학교 돌담으로 이용되고 있는 애월진성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 총안(銃眼)과 성곽 보도시설인 회곽도(廻廓道)가 남아 있다.


▲애월진성=애월진에는 1271년 삼별초가 입성한 후 관군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목성(木城)이 있었다.

1581년(선조 14) 김태정 목사는 애월포구 인근에 새로 성을 쌓았다. 둘레는 549척(166m), 높이 8척(2.4m)로 남·서문 위에 문루(門樓·초소)가 있었다.

1702년(숙종 28)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화첩인 애월조점을 보면 성정군(육군 수비부대) 245명, 목자와 보인 181명, 말 1040필이 있었다.

애월진성이 구축되면서 주민들은 주둔 병력에 의존하고 어업 활동을 하기 위해 포구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781년(정조 5) 6월에 제주순무어사로 부임한 박천형의 보고서에 따르면 성 안이 낮고 좁으며 우물과 저장할 양식이 없어서 왜적이 침입하면 방어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왜적의 침입에 시달리면서도 새로운 삶을 위해 이곳에 정착, 해상 진출과 해안 방어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

애월진성 옛 터에는 현재 애월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진성에 있던 남·서문은 학교 정문과 후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학교와 함께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성곽 대부분은 허물어졌다.

지금은 서문에서 남문사이 55m구간에 성벽이 남아 있다. 이 성벽에는 네모난 구멍을 뚫어 놓은 총안(銃眼)을 볼 수 있다.

또 성곽을 따라 돌 수 있는 보도시설인 회곽도(廻廓道)와 성벽 위에서 군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凸’ 모양의 여장(女墻·성가퀴)이 남아 있어서 방어시설을 연구하는 소중한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초등학교 돌담으로 이용되고 있는 수산진성은 현재 544m 둘레의 성벽이 남아 있다.

▲수산진성=우도에는 왜구가 자주 출몰했다. 이에 따라 제주도안무사 한승수는 1439년(세종 21) 왜구를 소탕할 목적으로 성산읍 수산리 580번지 일대에 수산진성을 축성했다.

축성 당시 둘레 1164척(352m), 높이 16척(4.8m)으로 9곳의 진성 중 명월·별방·차귀진성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규모로 설치됐다.

동·서에 2개 성문과 우물이 있었고, 성 내에는 진사(鎭舍·관아 건물) 3칸, 객사(客舍·숙소) 2칸, 익랑(翼廊·작은 행랑) 3칸, 군기고(軍器庫) 등이 들어섰다.

그런데 임진왜란(1592~1598년)이 일어나자 이경록 목사는 성산일출봉을 천혜의 요새로 보고 1597년(선조 30) 성산일출봉 밑 성산진성으로 이전했다.

성산진성은 둘레가 2000척(606m)으로 수 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경록 목사는 부친상 소식을 듣고도 고향에 갈 수 없었다. 임진왜란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임 기간이 6년 5개월이나 되었다.

그는 성 쌓는 일에 열성을 쏟았고, 이로 인한 과로 때문인지 얼마 후 제주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년 뒤인 1599년(선조 32년) 후임으로 온 성윤문 목사는 수산진성을 다시 원위치 시켰다.

성산진성에 우물이 없어서 고립되면 매우 위험해진다는 게 성윤문의 판단이었다. 제주에 안무어사로 온 김상헌도 성산진성에 머무는 것은 “적에게 스스로 포로가 되는 최악의 계략”이라고 평했다.

1678년(숙종 4) 이도원 어사(御史)는 “수산진은 바다에서 10리(3.9㎞)나 떨어져 있어 방어에 어려우므로 성산·오조·고성 등으로 옮겨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수산진의 지휘관인 조방장(助防將·종9품)은 1705년 만호(萬戶·종4품)로 승격됐으나 1718년 다시 조방장으로 환원됐다.

수진진성은 현재 수산초등학교 돌담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둘레는 544m, 높이 3.5~5.3m로 남아 있다. 성의 서·북면 모퉁이에는 격대(擊臺·덧붙여 쌓은 성벽)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에 이르면서 제주의 방어시설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지속적으로 보수·정비됐다.

조선 중기에는 동해진성을 철폐해 모슬진성으로 옮겼고, 화북진성을 축성하는 등 해안 방어를 굳건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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