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정의현의 도읍지이자 군사·행정·경제의 중심이었던 정의읍성에 설치된 남문 전경.


1416년(태종 16) 제주는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 등 행정구역이 1목(牧) 2현(縣)제로 개편됐다.

이른바 3읍제(邑制)가 실시되면서 목사(정3품)와 2명의 현감(종6품)이 세 지역을 나눠 다스렸다. 3읍 체제는 1416~1914년까지 조선 왕조 500년간 유지됐다.

한라산 남쪽의 동부지역은 정의현감이 다스렸다. 초대 현감은 이이(李貽)가 부임했다.

정의현의 현청은 원래 성산읍 고성리에 있었다. 그런데 동쪽 해안에 치우쳐 있고, 우도가 가까이 있어서 왜구의 잦은 침입에 시달렸다.

또 해풍에 의한 흉년으로 1422년(세종 4) 안무사 정간의 건의로 진사리(현 표선면 성읍1리)로 도읍지를 이전했다.

제주판관 최치렴을 감독관으로 삼아 1423년 1월 9일에 공사를 시작, 13일 만에 정의읍성을 완성했다. 13일의 짧은 기간에 성을 축성한 것은 삼읍의 전 백성이 동원됐기 때문이다.

성 둘레는 2520척(763m), 높이 13척(3.9m)이며 동·서·남 방향에 3개의 성문과 성벽 위에는 凸모양의 여장(女墻·성가퀴) 180개가 있었다.

관아시설은 임금의 위패를 모신 객사를 중심으로 북쪽에 현감의 집무처인 일관헌(日觀軒)과 죄인을 가두는 형옥(刑獄), 향리의 우두머리가 근무하던 작청(作廳)이 있었다.

또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 건물로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이뤄진 향교(鄕校)와 수령을 자문·보좌하던 자치기구인 향청(鄕廳)이 들어섰다.

1653년 편찬된 이원진의 탐라지에 따르면 정의현에는 파총(把摠·최고 지휘관) 1명, 성장 2명, 초관 7명, 마병 260명, 성정군 591명, 속오군 390명, 봉·연군 60명, 봉족군 60명이 있었다.

1702년 제작된 탐라순력도에는 23리 마을에 민가 1436호, 전답 140결, 군인 664명, 말 1178마리, 흑우 229마리를 보유했고 창고의 곡식은 4250석으로 번성한 읍성으로 기록됐다.

단, 2곳의 우물은 생수가 아니라 빗물을 담아 사용하면서 가뭄이 들면 읍성의 남쪽 2리에 떨어진 대천수(大川水·천미천)의 물을 길어다 썼다.

물을 쉽게 얻을 수 없어서 현청을 토산리나 영천관(상효동)으로 이설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정의현은 왜구의 침입에 시달려 왔다. 1552년 천미포(성산읍 신천리)에 왜구 200여 명이 상륙, 주민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를 막아내지 못한 김충렬 목사와 김인 정의현감은 파직됐고, 후임 제주목사로 임꺽정을 토벌한 무장 남치근과 신지상 현감이 부임했다.

1554년 왜구는 또 다시 천미포로 침입했으나 민·군이 힘을 합쳐 물리쳤다.

1679~1681년까지 3년간 정의현감으로 부임한 김성구가 제주의 풍토와 정의현의 모습을 기록한 남천록에 따르면 토지는 매우 척박해 2~3년을 연이어 경작할 수 없다고 했다.

또 밭에 동·서 경계 표시가 없고 자호(字號)와 결수(結數), 그리고 밭 이름(員名)도 명백하지 않아 소송이 매우 많다고 했다.

김성구는 남천록에서 정의현 관아(성읍)에서 의귀까지 30리, 의귀에서 서귀포까지 40리로 도합 70리(27.5㎞)를 지나는 동안 의귀와 효돈 두 마을을 제외하고는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서귀포 칠십리(七十里)는 조선시대 정의현 관문인 성읍에서 서귀포의 서귀진까지 거리를 나타내는 개념이었으나 오늘날은 서귀포 전체를 상징하는 말이 됐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정의현과 대정현은 제주군으로 합병돼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번성했던 옛 고을의 도읍지는 성읍민속마을로 부활했고, 정의읍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읍성(邑城)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