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법전인 대전회통에선 “제주 3읍은 죄명이 특별히 중한 자가 아니면 유배시켜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제주는 중죄인이 유배됐던 곳이었다.

조선시대에 대역죄인으로 찍힌 정치범들을 제주로 보낸 반면 백성들은 뭍에 함부로 나가질 못했다.

1629년(인조 7)부터 1823년(순조 23)까지 200년간 국법으로 시행된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 때문이다.

도민들은 관리들의 수탈과 왜구의 침입, 지나친 진상에 따른 부역, 큰 흉년과 전염병이 돌때면 전라·충청·경상도 해안을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중국 요동반도 해랑도에 들어간 도민들도 20여 명이 됐다.

섬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던 제주사람들의 무리를 한라산의 별칭이었던 ‘두모악’, ‘두무악’, ‘두독야지’라 불려졌다. 또 해산물을 채취해 생활한다고 해서 포작인(鮑作人)이라 불리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랑민의 수가 증가해 출륙금지령이 내려졌다. 현종실록에 의하면 도망친 노비만 1만명이 넘었다고 한 것에 미루어 2만 이상의 인구가 빠져 나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로 인해 조선 중기 제주 인구는 5만명 안팎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고려시대 쌍돛을 단 대형선박과 전선(戰船)을 진상할 만큼 뛰어난 조선기술을 지녔던 제주사람들은 출륙금지령으로 항해 및 선박제조 기술이 단절됐다. 반면 제주어의 고유성과 민간신앙 등 독특한 풍속이 보존됐다.

김상헌의 남사록에는 당시 상황이 절절하게 그려졌다. “백성들의 딱한 처지가 임금에게 알려질까 봐 수령들은 진상하러 가는 자 말고는 아무도 섬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섬사람들은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육지에 나가기를 마치 천당에 가는 것처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