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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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현

며칠 전 후배 L의 딸 결혼식이 있었다. L의 아내인 K부인은 밝은 표정으로 하객들을 맞고 있었다. 여자 혼자 힘으로 어린 자식들을 부양하며 세파를 헤쳐온 험한 세월이어서, 혼례를 치르는 K부인의 감회는 남달랐을 듯하다. 생업에 바쁜 중에도 종교생활과 봉사활동을 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그녀의 말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어릴 적부터 친했고, 늘 막역한 사이로 지내던 후배 L은 배려심이 많고 매사 적극적이었다. 원만한 처신으로 일터에서도 인정받아 동기들보다 먼저 승진했다. 승진  첫 출근날 아침, 만삭 아내에게 산통이 왔다. 분만을 위해 예약된 병원에 데려다두고, 근무처에 승진 인사하고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일터로 향했다. 기쁘고 설레는 마음이 서두르게 했는지 출근길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전날 밤 늦게까지 축하 자리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앞날의 계획들로 마음이 부풀어 있었는데, 끔찍한 불행에 마주한 나는 막막한 심정이었다. L은 도저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어린 아이들과 세상 물정 모르고 착하기만 한 아내를 두고. 이제 막 피어나는 꽃잎이 휘몰아치는 광풍에 지듯이 황망한 길이었다. 펴보지도 못한 기량과 뜻이 아깝고, 남겨진 아이들이 안타깝고 서러웠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해산 후 몸조리도 못한 채 장례를 치르는 K부인의 슬픔과  그 초라함이라니……. L이 떠난 그 가을은 K부인에겐 악몽의 나날이었다. 남편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아 넋을 놓고 지낸다는 전언이었다. 엉겁결에 장례를 치르고 나자 밀려오는 상실감과 세상에 대한 까닭 없는 원망스러움이 무력감으로 다가왔다. 마음을 가라앉힐 수도,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K부인을 일으켜 세운 것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었다. 의욕이 고갈된 그녀에게 아이들은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정을 깨워내는 마중물이 되었다. 닥쳐온 냉엄한 현실은 자식들 양육과 생계 문제였다. 아이들을 향한 간절한 염원이 인내와 불굴의 의지가 되어 아이들을 당당하게 키우는 게 유일한 소망인 시련의 세월이었다. 결핍은 더욱 분발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밟히면서도 꽃을 피우는 잡초처럼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는 들풀 같은 생명력으로 치열한 삶을 살아냈다. 지쳐도 쉽게 쓰러질 수 없었기에 지고지순의 헌신으로 능력 밖의 능력을 꺼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과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일마저 힘겨운 세월, 세상이 외면해 버리는 절망의 순간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야했던 엄혹한 세월이었다. 힘든 어려움 속에서도 아이들 눈빛 속에서 열정을 얻고,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와 성장이 인생을 견딜 힘을 주었다.


누가 불행한가. 가난하거나 고난에 처한 사람 모두가 불행하지는 않다. 불행한 사람은 따로 있다. 도무지 불행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잠을 못 이루고, 식욕을 잃고, 우울하고 고독해서 죽지 못해 산다. 삶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고 그들은 좌절한다. 사랑하는 그 누구도 없어서,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신뢰할 수 없기에 그저 외롭고 쓸쓸할 뿐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난도 가난도 아닌, 삶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없는, 사랑하는 그 누구, 사랑하는 그 무엇도 없는 인생이다. 시련이나 아픔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불행 속에서 의미를 찾고 역경을 헤쳐 나가려는 의지를 가진, 삶의 목적이 뚜렷한 사람에게는 경이로운 극복의 힘이 주어진다. 크나큰 시련 속에 있을지라도 시련은 불편하고 힘들게 하지만 불행하게 하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그 무엇이 있는 한 산다는 것, 그저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참으로 아름답다.


가슴에 쌓인 설움의 떨켜를 씻어낸 K부인의 얼굴에는 주어진 운명의 끈을 억척스럽고 질기게 붙잡아 벼랑 끝을 넘어선 의연(毅然)함이 고여 있다. 그 옹골찬 삶의 의지와 검질긴 정신력으로 삶의 소용돌이를 감내해왔을 것이다. K부인의 눈물은 절실하고 절박한 상황의 삶을 분투하듯 살고 나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영혼이 흘리는 땀에 다름 아닌 눈물의 맛은 곧 인생살이의 맛일 것이다.
누군가를 지극하게 사랑하는 간절함, 그 사랑이 있는 한 세상은 견딜 만하고 세상은 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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