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마당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차수/수필가

달포 전 어느 사진작가의 전시회를 봤다.


여러 종류의 사진이 걸렸지만 1960년대 초라는 조그만 글귀가 적힌 흑백 사진 앞에 나는 한참이나 서 있었다. 양지바른 마당가운데는 가을 곡식이 널려있고 그 옆에 할머니와 손녀가 수줍게 미소 짓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어찌나 포근하던지 갑자기 사진 안으로 쏘옥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정겨운 시골마당을 담은 오래된 사진 내 어릴 적에도 저런 모습이었는걸.


마당의 추억을 어찌 다 말하랴. 오래전 초등학교 시절 마당은 내 또래 벗들에게 언제나 놀던 공터였지.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친구들은 책가방을 한구석에 쌓아놓고 고무줄, 숨바꼭질, 소꿉장난 해질녘까지 흙 마당에서 잘도 놀았다. 어두워 질 무렵 배가고파오고 성난 어머니 얼굴이 떠오를 때까지 마당은 우리들의 세계였다. 그곳에서 놀이하던 벗들은 금방 토라졌다가도 헤헤거리며 손을 잡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어른들에게도 마당은 역시 유일한 소통이 장이었다. 더운 여름날 온종일 뙤약볕 아래서 일을 하다 저녁 이슬이 내리면 마을 사람들은 넓은 마당 평상위로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도 아이들은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찾는 게임을 즐겼다. 때마침 지나가던 달빛도 심심하면 마당에 내려앉아 우리들과 동참했다.


이제 세상은 너무도 달라져 마당이 있는 구식 집은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요즘 몸담고 있는 주거 형태는 예전에 비해 거의 획일화되면서 도시나 농촌이나 키 높은 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웃과의 관계보다 개인적 자유와 편리함까지 갖춘 아파트는 인기가 대단하다. 세상인심도 예전 같지 않아 마당이 없는 공동 주택에서는 소음이란 이유로 간혹 위 아래층 갈등도 심화되고 있는 듯하다.


이 세상에 다툼이 없는 곳도 있을까만. 예전에 마당이 있는 집에서도 티격타격은 있었다. 무슨 일인지 동네 어른 두 분 이서 서먹한 관계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더운 날 마을유지들은 이장님 댁 마당에 모여 두 분을 불러들였다. 한 분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른들의 몇 마디 말이 오가고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두 분은 손을 잡아 농주 잔을 들었다. 어르신들의 조정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마당은 동네사람들 모두가 사소한 문제에 대한공론이 장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그들 옆에 앉아서 다른 것엔 도통 관심이 없고 옆에 놓인 큰 수박이 언제 잘릴까 그것만 기다렸었다.


당시 동네 분들은 법률 공부를 많이 한 판사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변호사도 아니었다. 투박하고 순박한 사람들 그들의 말은 곧 법이고 질서였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작은 분쟁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해결되었다. 돌이켜보면 어른들의 지혜와 인생관속에 우주를 품어 안을 만한 덕목도 들어있었던 것 같다.


이제 이웃들과 어우러졌던 마당이 있는 집 인심은 차츰 멀어져 가고 있다. 사람들은 남의 고통과 슬픔에 둔감하다. 한여름이면 왁자지껄하던 그 마당에 한 가족끼리도 모여 앉기가 쉽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어 가끔은 적막감이 돈다.


마당은 가장 낮은 곳에서 크고 작은 것을 넓게 품어 안았던 장소이다. 오래된 집 마당에는 장편소설 또는 대하소설보다 훨씬 긴 가족사를 들을 수 있는 곳 마당. 집집마다 울타리에 돌담처럼 켜켜이 쌓인 옛이야기 한 토막쯤은 묵묵히 간직하고 있다.


내어릴적 소달구지를 몰며 어렵사리 살아가던 옆집 아버지는 병중에 홀로 몸져누워 사경을 헤매면서도 바깥소식에 귀를 세우던 어느 날, 아버지 아들은 명문대합격이라는 통지서를 들고 단숨에 마당을 가로질러 방문을 열렸었고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순간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극도로 고통을 견디던 아버지는 며칠 있다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상여가 집을 나갈 때 아들이 통곡소리를 마당은 참담한 아픔과 침묵으로 담아냈던 곳이다.


삶이란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 우리가 함께했던 마당의 애환을 무엇에서 찾아야 하나. 새 시대의 바람은 묵은 정서를 조금씩 날리며 어디까지 불어가는 것일까.


6월의 청정함은 더욱 푸르러 가는데 가뭄 끝에 연이틀 단비가 내린다. 마당에 물먹은 잔디는 환호하듯 가녀린 손들을 들어 올리고 있다. 빗물이 마당 한가운데로 모여 흐른다. 창을 열자 물씬 풍겨 오는 신선한 풀 내음. 우리 집 마당에도 과거와 현재 미래가 빗물에 젖어 떠돌고 있다.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