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리 최정숙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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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건 제주대 교수 교육학 전공/논설위원

“나는 5 16 민족상의 부상으로 받은 상금 1백만원을 가지고 빚을 청산하고 정화장학회를 만들어 빈곤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1968년 교육감 퇴임식 때 많은 인사들이 나를 뜨겁게 격려해줬지만 내가 갈 곳이 없게 된 서러움을 겪어야했다. 다행히 천주교회 재산인 지금 사는 집을 빌려줘 이곳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은 학교장, 병원장, 교육감을 역임한 내가 집 한 칸도 없다면 비웃을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서 돈 벌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 끝에 병원을 열었지만 군속들을 돕다보니 오히려 곤란을 받아야했고 30여 년간 교직에 몸담아왔지만 무보수로 일 해왔기 때문에 돈을 만져보지 못했던 것이다. 교육감 월급을 받을 때 겨우 생활에 불편이 없었을 뿐이라 할까.”

이렇게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최정숙 선생이다. 최정숙(崔貞淑, 1902~1977)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고 의사이며 종교인이다.

최근 그 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필자 역시 ‘아, 김수환 추기경1,2’(김영사, 2016)을 쓴 이충렬 선배에게 자극을 받아 최정숙 선생의 평전을 써보려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최정숙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방안’(이재섭, 제주대학교, 2016)이라는 제자의 석사학위 논문을 지도했고 필자 역시 최근 “제주교육에 대한 최정숙의 헌신과 배경 연구”라는 논문을 탈고하여 심사 중에 있다. 그러면서 여러 자료들을 모으는 중이다.

그러던 중에 최정숙 선생의 묘가 한라산 기슭의 제주충혼묘지에 있음을 확인하고 찾아가 보았다.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그 분의 묘를 참배하고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분의 비석에는 “1933년 3월1일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으로 새겨져 있었다. 1993년의 명백한 오류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8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제주인명사전’을 다시 만들고 계신 김찬흡선생님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크게 화를 내셔서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서둘러 교체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알게 된 최정숙선생은 독립운동가, 교육자, 의사 이전에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다. 최정숙 선생은 “‘수녀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12세 때 영세를 받았다. 이 종교의식을 거치려면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말씀드렸다가 호통만 받고 영세를 못받게 막았던 것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러나 천주님께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의 심정을 간곡히 말씀드리고 신원 보증을 받아 ‘배아뜨릭스’라는 세레명으로 영세를 받을 수 있었다”고 밝힌바 있다. 12세 소녀시절의 맹세가 그녀의 일생을 지배했던 것이다. 12세 소녀가 했던 맹세의 핵심은순교적 삶이었다. 그녀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 진학을 결행했던 것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일제에 대해 만세운동을 펼쳤던 것이나, 37세의 뒤늦은 나이로 의사공부를 시작해 병원을 차려 무료진료를 했던 것이나, 평소 수녀가 되길 원했던 것이나,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이나, 여수원이나 명신학교 등을 세워 교육 활동을 했던 것이나, 신성여자중학교, 고등학교 무보수 교장을 지내고 제주도 초대교육감을 역임했던 것 모두 결국은 그녀가 순교의 삶을 증거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야말로 일관초지의 삶이었다.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가 20세기의 모범적 평신도로 김익진, 김홍섭, 서상돈, 장면과 함께 최정숙을 선정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올바른 가치관의 부재와 혼돈 속에서 최정숙 선생을 거울로 삼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땀의 순교’는 오늘날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최정숙 선생을 제대로 평가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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