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민법 공부하는 사람’, 대법관 지내고 다시 학교로…
(1)‘민법 공부하는 사람’, 대법관 지내고 다시 학교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제주북초 졸업 서울 유학길 올라 국사학 관심 많았지만 집안서 법대 진학 권유
학문 동경 등 짧은 판사 생활 접고 민법연구·민법주해 등 저술하며 민법계 ‘최고’
양창수 전 대법관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법조인이자 민법학자다.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에서 중·고교 및 대학 생활을 하면서 한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사법시험 합격 후에는 법조인으로서 주어진 업무에, 그리고 서울대 교수 시절에는 학자로서 학문에 매진했다. 

이 같은 남다른 노력과 열정으로 그는 민법 분야에 있어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봉에 올랐고 대법관에 오르는 영예도 안을 수 있었다.
 

▲출생 및 성장 과정=양창수 전 대법관은 1952년 10월에 제주시 일도1동 1441번지에서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고 제주대 법학과 교수를 지냈던 양홍기 전 검사장이 조부이며 양치종 전 제주도 교육감이 부친이다.

제주의 명문가 출신인 그는 제주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고모의 돌봄을 받으면서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서울 생활을 하다 보니 외로움을 많이 겪었지만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며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서울중학교를 수석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철학·역사 서적은 물론 세계문학전집, 그리고 ‘창작과 비평’ 등의 문예지도 두루 섭렵할 만큼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교 시절에 완벽하게 습득한 영어와 독일어는 나중에 독일이나 미국 등 외국 유학에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는 시국사건으로 학교에서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3선 개헌’이 이뤄지자 반대 선언문을 작성 하는 등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을 받은 것이다.
 
▲서울대 진학과 사시 합격=양 전 대법관은 애당초 대학에 진학하면 우리나라 역사, 즉 국사를 공부하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국사학계에서 식민사학 청산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형 둘은 아버지를 따라 이공계로 가고 셋째는 할아버지를 따라 법대로 보낸다”는 집안의 결정을 거스르지 못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야만 했다.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합격한 그는 1학년을 끝낼 무렵 국사학과로 전공을 옮기기로 마음을 정하고 전과 절차를 밟는데 당시 법대 학장이 “수석 입학생이 무슨 일 있느냐”고 하면서 미심쩍어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문리대에 전과 원서를 접수한 후 모든 것을 전해들은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와 간곡하게 설득하자 부모님의 의사에 따르기로 함으로써 이 일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그 후 그는 한동안 법 공부를 등한시한 채 프랑스어 공부, 극단 활동, 막스 베버 등 사회과학 서적 탐독 등으로 방황 아닌 방황을 하기도 했다.


2학년 말부터 다시 법 공부를 시작한 그는 대학 3학년 때는 친구와 같이 충청도에 있는 암자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72년 10월 유신으로 학교가 폐쇄되는 등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1973년 겨울 제16회 사법시험에 무난히 합격하는 영광을 안게 됐다.

 
▲짧았던 판사 시절=양 전 대법관은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한 후 1974년 9월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게 된다.

2년 동안의 사법연수원 생활을 끝낸 후에는 1976년 10월부터는 육군 법무관으로 강원도 양구·춘천 등지에서 3년 동안 군 복무를 했다.

그는 법무관 시절 시간이 날 때마다 외국어 공부를 했고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인 ‘10·26사건’이 있은 지 며칠도 채 지나지 않은 1979년 11월 1일에 그는 판사로 임명을 받는다. 첫 발령지는 서울민사지방법원이었다.

그 후 1982년 3월 서울형사지방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82년 7월 독일(서독)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독일은 후진국 원조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법률가들에게 자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양 전 대법관은 그 대상자로 선정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1983년 10월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부산지방법원 민사 단독 판사로 부임했다가 1984년 5월 대통령 비서실로 파견돼 근무를 하면서 전두환 정권을 경험하기도 했다.

1985년 서울대 강단에 서기 위해 판사직을 그만둠에 따라 그의 판사 재직 기간은 5년으로 짧았다.
 
▲한국 최고의 민법학자로 거듭나다=양 전 대법관은 “민법학자로서의 길을 가게 된 계기는 1985년 1월 초에 서울대 교수이셨던 민법학계의 원로 곽윤직 선생에게 세배하러 갔다가 학교로 오라는 말씀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원래부터 품었던 학문에의 동경도 컸었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의 스승인 이호정·송상현 교수 등의 권유도 판사에서 학자로의 변신에 힘이 됐다.

양 전 대법관은 그 때의 결정을 두고 “이제 소송사건 처리와 같은 ‘주어진 일’이 아니라 책을 읽으며 연구하고 글을 쓰는 ‘원해서 택한 일’을 하게 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서울대 강단에 선 그는 스스로를 ‘민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우리나라 법학의 전통이 아직 빈약하다는 것을 인식, 새로운 방법론 아래 우리 사회의 다양한 법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했다.

특히 그는 선배 민법학자들이 주로 교과서 위주의 저술 활동을 한 것과 달리 “논문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민법 연구에 매달린 끝에 ‘민법연구’(도합 9권)과 ‘민법주해’(도합 19권)의 주요 부분 주석, ‘민법입문’ 등을 저술했다.

그는 또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사법 연구단체인 한국민사법학회와 민사판례연구회에서 회장을 역임하며 민법 연구 활동에 전념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민법학자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대법관 때는 대법원의 민사실무연구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학자로서 대법관에 임용되다=양 전 대법관은 2008년 8월 이용훈 대법원장에 의해 대법관으로 제청됐다.

당시 이 대법원장은 “대법관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 덕목 이외에 재야 법조인의 대법관 임명과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라는 사회적 요청을 두루 참작해 재야 법조인이면서 학계 출신의 양 교수를 제청했다”고 밝혔다.

학계에서 20년 이상 교수로 재직하던 학자가 대법관으로 제청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가 대법관이 돼서 처음 느낀 것은 대법관이 처리해야 할 각종 사건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사실이었다.

양 전 대법관은 “대법관으로 임용된 2008년에는 대법관 한 사람이 본안사건만도 연간 2400건 정도, 대법관 임기를 마무리한 2014년에는 1인당 3000여 건의 사건을 맡아야 할 정도로 많았다”고 밝혔다.

이처럼 사건이 많다 보니 양 전 대법관은 “한편으로 가능한 한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수없이 제기되는 어려운 법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대법원은 사건 해결의 최종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이 나면 당사자들은 더 이상 호소할 데가 없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했고 당사자들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사연들을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대법관 전원이 심리·판단에 관여하는 전원합의체 재판으로부터 많은 것을 새로 배울 수 있었다.”고 대법관 시절을 회고했다.
 
▲학자로 다시 돌아오다=양 전 대법관은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이나 로펌 취업 등을 하지 않고 강단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스스로를 ‘민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크게 다치지 않고 6년 대법관 임기를 마치고 대학교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큰 다행”이라고 말했다.

대법관 임명을 받을 때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했던 그는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있는 제자들의 청에 이끌려 한양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됐다. 민법 분야의 여러 과목을 강의하고 있는 그는 “민법은 법 공부의 출발점이자 기본에 해당되므로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치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민법을 잘 배워야만 다른 법 분야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법학전문대학원 3년 동안에 변호사를 양성해야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법률가 양성제도가 중대한 시련의 시기에 있다고 진단한다.

종전에는 학부 과정 4년 동안 법학을 전공한 학생이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2년간 사법연수원에서 법관이나 검사·변호사로부터 법을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해 처리하는 훈련을 받아 최소 6년에 걸쳐 이뤄지던 변호사 자격 취득 훈련을 이제는 3년 만에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법학전문대학원의 학생이나 교수들 모두가 이러한 문제를 깨닫고 대책을 강구해야 하며 철저한 각오를 다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결혼과 가족=양 전 대법관은 1979년 6월 권유현 씨와 결혼을 했다.

서울대 법대 후배이며 한국인 최초로 유고국제형사재판소 부소장을 지낸 권오곤 전 재판관이 서울대 불문과에 다니던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해 준 것이다.

양 전 대법관은 “군 법무관 시절, 아내를 처음 소개를 받는 날에 버스를 기다리다 재미로 새점을 쳐봤는데 ‘가인(佳人)을 만나 장래를 약속한다’는 점괘를 받았다”며 “일생 동안 제일 잘한 일이 아내를 만나 결혼한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자녀로는 딸 정윤 씨와 아들 승우 씨가 있다. 정윤 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니던 중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유학가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가 서울대 법대 출신인 외교관 정기용 씨와 결혼했다.

승우 씨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로 재직 중인데, 지난해 서울대 환경대학원 박사 과정에 있는 신희영 씨와 결혼했다.
 
▲앞으로의 인생 계획=양 전 대법관은 앞으로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훌륭한 법조인 양성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 나갈 계획이다.

또한 민법학자로서 우리 사회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 우리 국민들이 생활을 영위하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우리나라에 고유한 문제들의 법적 처리에 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예정이다.

가정으로 돌아가서는 지금 8살인 외손자와 곧 태어날 친손자에게 좋은 할아버지가 되겠다는 소박한 소망도 갖고 있다.
 
▲고향 제주에 대한 추억과 미래의 발전 방향=양 전 대법관은 1964년 봄 제주를 떠난 후 지금껏 타향살이를 해왔지만 “고향이란 쉽게 멀어질 수도, 멀리 할 수도 있는 게 아니”라고 정의했다.

“할아버지 댁에서 바라보던 한라산, 제주북초를 다닐 때 탑동 바닷가에서 헤엄치던 일 등이 문득 생각나곤 한다”는 그는 “제주의 가장 큰 자산은 자연”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제주는 전 세계의 명승들과 비교해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고 후대에 제대로 물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며 “눈앞의 이익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중국이 미국과 함께 G2로 부상하면서 굴기(?起)의 자세를 굽히지 않고 있는 추세를 볼 때 제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더 높아질 것”이라며 “앞으로 제주의 장래와 관련해 ‘평화’의 가치를 연계시키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제언했다.
 
김승종 기자 kimsj@jejunews.com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