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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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희/수필가
신록이 고운 오월 하늘이 티 한 점 없이 맑다.

부산 금정산 기슭에 자리한 금강암 법당 안에도 따스한 햇살이 넉넉하게 들어와 앉았다. 스님의 염불 소리가 오늘 따라 더 구성지다.

아침 햇살이 창을 넘어오자, 사부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손가락을 꼽으며 머리를 갸우뚱거리다가 물었다.

 “사돈, 내 올해 몇 살 인교?”

 “사돈, 내 아들이 서이 뿐 인교?”

나이도, 아들 넷도 기억 못하신다.

내 나이 오십 중반에 교직에 있는 딸네 집에서 육아와 살림을 맡은 지 두어 해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홀로 노년을 보내던 사부인이 치매 진단을 받자 딸네 집으로 모셔왔다. 아들이 넷이나 있다지만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아 막내아들인 사위가 간곡히 부탁을 하고 내가 흔쾌히 승낙하면서 사부인과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나는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모셨다. 약을 잘 챙겨 드려서인지 치매 증세가 안정을 찾는가 싶더니, 언제부터인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서슬이 퍼렇던 사부인의 성정도 점차 힘을 잃어갔다.

딸 부부가 해외여행을 갔다가 선물을 사왔는데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40분 거리의 지하철을 타고 하루에 네 번씩 왕래하며 선물 꾸러미를 풀었다 묶기를 반복하셨다. 그 광경을 지켜보자니 마음이 아려와 눈물을 훔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먼 훗날 내 모습을 상상하며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싶었다.

병의 속성상 저녁 무렵에는 더욱 힘이 솟는 사부인에 비해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되는 말 대접에 기진맥진하여 급기야 탈이 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자녀들이 번갈아 모시기로 의견을 모았다.

큰집으로 가신지 며칠 지나지 않아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집안에 가족이 없는 틈을 타서 사부인이 집을 나갔는데 해가 어둑해서야 행방이 묘연함을 알았다. 일단 신고를 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하면서 애타게 기다리던 중, 새벽 한시쯤 먼 거리에 있는 파출소에서 전갈이 왔다. 길가에 앉아있는 노인을 파출소로 모셔왔으니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단숨에 달려갔다. 사부인이었다.

초췌한 모습을 한 사부인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꼭 쥐고 있는데 그 안에는 쓰레기가 들어있었다. 평소 깔끔한 성격인지라 길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를 보고 지나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들을 주우며 한발 한발 이 먼 곳까지 걸어온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자기 어머니만은 그런 병에 걸릴 분이 아니라며 인정하지 않던 자녀들도 그 일이 있은 후 요양원으로 모셨다.

사부인은 이십 년 긴 세월 동안 무심, 무념, 묵언으로 한 점 빛을 향해 기나긴 터널을 기어이 완주하셨다. 사부인의 영정 사진을 가만히 쳐다보노라니 옛 기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오뉴월 더위가 문턱까지 와 있던 어느 날, 사부인이 문이란 문은 모두 닫아걸고 소파에서 쉬고 있는 나에게 “춥지요?” 하며 이불을 덮어주고 다독여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용한 의원을 찾아 모시고 갔을 때 의사가 모녀지간이냐고 묻자, “사돈, 우리는 전생에 자매였지요?”하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던 모습도 아련하게 스친다. 
 
스님의 염불소리가 점점 더 크게 법당 안에 울려 퍼지고 있다. 피어오르는 향 연기 따라 무지개를 건너는 사진 속 사부인의 표정이 편안하고 행복해 보인다.

문득 궁금한 생각이 뒷덜미를 친다.

“무릇, 인생이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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