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명석한 두뇌 자랑하던 고학생 중견 정치인으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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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학회로 대통령과 인연…평통 수석부의장 역임
▲ 어릴적 명석한 두뇌를 자랑하며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학창시절을 보낸 현경대 前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박근혜 대통령의 몇 안 되는 막후 조언자로 알려진 현경대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의 별명은 ‘현폴레옹’이다.


나폴레옹처럼 키가 작지만 논리가 명쾌하고 추진력과 결단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이 별명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붙여줬다는 설과 16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던 김종호 전 의원이 처음 불렀다는 설, 중앙 언론에서 처음 썼다는 설, 제주도민들이 지어줬다는 설 등이 무성하지만 정작 본인은 어떻게 이 별명이 처음 붙여졌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제주인으로서 한국 정치의 거목으로 자리해 온 그에게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는 생각이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
현 전 수석부의장의 어린 시절은 매우 힘들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4.3 당시 경찰에 연행된 후 행방불명이 됐다.


결국 어머니는 4.3 사건이 진정된 후인 1949년 봄 다른 주민들과 함께 집단 매장된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때문에 현 전 수석의장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다섯 살 위인 누나와 함께 사실상 고아가 되다시피 했고 이모의 도움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시절부터 명석한 두뇌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6학년 때 전국적으로 처음 치러진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제주 1등을 차지했다.


그 결과 오현중.고를 운영하던 오현학원으로부터 입학 권유를 받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년 동안 학비를 대주고 야간에는 학교 급사로 아르바이트를 시켜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가 오현중을 거쳐 오현고에 진학하게 된 이유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전교 어린이회장을 지냈던 그는 오현고에서도 학생회장에 출마, 압도적으로 당선되며 그의 리더십 또한 인정받았다.

 

▲서울대 시절과 정수장학회 장학생
현 전 수석부의장은 고등학교 때부터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號)를 딴 우남장학금을 받았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서도 1.2학년 때까지는 우남장학금을 받았다.


하지만 대학 2학년 때 5.16이 발발하자 그는 장학금을 못 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되면 휴학을 하든지 군 입대를 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학교 추천으로 3.4학년 때는 5.16 장학회(정수장학회 전신)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장학금은 사립대 수준으로 나왔는데 서울대가 국립대인 관계로 사립대보다 학비가 상대적으로 싸서 장학금으로 학비를 내고도 여유가 있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장학금과 가정교사 수입으로 무사히 대학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5.16 장학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인 198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과 육영수 여사의 ‘수’를 따서 정수장학회를 이름이 바뀌었다.


정수장학회 장학생들은 대학 시절에는 ‘청오회’, 졸업한 뒤에는 ‘상청회’라는 모임에 가입했는데 현 전 수석부의장은 1970년대에 상청회 초대회장을 역임하는 등 세 차례나 상청회 회장을 맡았다가 1997년에 다시 상청회장을 맡았다.

 

▲ 제 16기 민주평화통일자문화의 전체회의 후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현 前 부의장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 그리고 ‘7인회’
현 전 수석부의장이 1997년 다시 상청회 회장을 맡았을 때 정수장학회 이사장이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이 때 장학회 이사장과 장학회 회장으로서 박 대통령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 후 박 대통령이 1998년 국회의원 재보선 때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달성에 출마해 당선된 후 같은 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을 함께 했다.


또한 2004년 3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박 대통령이 당 대표로 선출될 때는 현 수석부의장이 전당대회의장으로 ‘박근혜 후보 당 대표 당선’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차떼기 당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박 대통령이 당대표로서 천막당사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한나라당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며 “거듭된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대담함과 결단, 추진력을 보고 2012년 대선 때부터 박 후보를 돕게 됐다”고 박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박 대통령의 원로자문그룹인 ‘7인회’와 관련해서는 “7인회는 사실 실체가 없다”며 “7인회로 불리는 인사들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박 대통령을 도운 분들의 이름을 망라해 놓은 것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 “7인회라는 명칭도 없을 뿐 아니라 정기적인 모임도 없다”며 “다만 연락이 닿으면 한두 분과 식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관계”라고 해명했다.

 

▲ 서울평화 통일 포럼

▲정치인 현경대의 성공과 시련
현 전 수석부의장은 소위 잘 나가던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를 그만두고 제11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했다.


1980년 12월에 여당인 민정당이 변정일 의원을, 제1야당인 민한당은 김택환씨를 조직책으로 선정했다.


그러다보니 제주시민들이나 주변에서 권유가 많았다고 한다.


이듬해인 1981년 1월에는 쉬는 날이면 제주에 자주 내려오면서 많은 고민을 하다가 그해 2월에 사직을 하고 11대 총선에 출마, 양정규 전 의원에 이어 2위로 당선됐다.


당시 총선은 중대선거구로 치러졌고 제주지역은 도 전역을 하나의 선거구로 통합해 2명의 당선자를 배출시킬 때였다.


이어 12대 총선에서는 1위로 당선하며 연임에 성공했다.


반면 소선거구제로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는 제주시 선거구에 출마, 고세진 전 의원에게 떨어져 낙선했다.


그 후 절치부심 끝에 14~16대 총선에서 세 번 연속 제주시 선거구에서 당선되며 5선의 고지에 오른다.


하지만 그의 국회의원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17대 총선에서는 제주시 갑 선거구에서 탄핵돌풍에 쓰러졌고 18대 총선 때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공천이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2위에 머물렀다.


19대 총선 때는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여권 성향의 표 분산 등으로 당시 민주통합당의 강창일 의원에게 17대 총선부터 내리 세 번째 고배를 마셔야 했다.

 

▲무너진 국회의장에 대한 꿈
현 전 수석부의장은 17대 탄핵 광풍에 의해 낙선되지 않고 당선됐다면 국회의장에 도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한나라당 공천자 중 홍사덕 의원하고 두 사람이 최다선인 5선이었는데 홍 의원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데다 비례대표 의원 선수도 포함하고 있어 17대 총선에서 당선만 됐더라면 가장 국회의장직에 근접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는 또 19대 총선에 출마한 것도 마지막으로 국회의장직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시사했다.


그 때 상황으로는 제주에서 대통령이나 대법원장이 나오기는 쉽지 않았고 그나마 국회의장이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는 것이다.


19대 총선 때도 당선됐더라면 당연히 국회의장에 도전했고 충분히 당선 가능성이 있었다고 자신했다.

 

▲5선 국회의원으로서의 역할
현 전 수석부의장에게 5선 국회의원으로서 수많은 법안을 입안하고 정책을 수립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 3~4 건을 손꼽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1987년 9차 개헌 당시 국회 헌법개정안기초소위원회 위원장과 개헌특위 간사를 맡아 실무 작업을 주도했다.


당시 민주화 열망을 담아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인 현행 정치체제를 만든 주역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또 15대 국회의원 당시인 1996년 양정규.변정일 의원 등과 함께 여야 의원 151명의 서명을 받아 4.3특위 구성 결의안을 제출했으며 1999년 11월에는 이들 의원과 공동으로 4.3특별법안을 발의했다.


특히 ‘농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안법)’을 개정하면서 계절적으로 집중 출하되는 농수산물이 과잉 생산되면 출하 조절 및 생산 조정을 명령할 수 있는 근거도 만들었다.


감귤유통명령제가 바로 농안법의 이 조항을 근거로 실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지방세수 확대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제주선박등록특구제’도 2002년 그의 주도로 도입됐다.

 

▲민주평통 사무총장에서 수석부의장으로
1990년 3월 19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13대 총선에서 낙선한 현 전 수석부의장을 민주평통 사무총장(장관급)으로 임명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현경대 의원은 개헌 작업 때문에 지역구 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떨어졌다”며 아쉬움을 피력했다고 전해진다.


이 대목에서 그의 민주평통 사무총장 임명 배경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민주평통 사무총장으로 임명되기 전에는 관선 제주도지사 제안을 받기도 했다는 그는 “완곡하게 사양했다”고 숨겨뒀던 이야기도 꺼냈다.


그는 14대 총선 출마를 위해 1992년 1월 8일 사임하기까지 1년 9개월 여 동안 민주평통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그 후 2013년 5월 2일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다시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임명된다.


민주평통 사무총장을 그만둔 지 21년 4개월 만이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서 가장 역점을 둔 부분
그는 “인류 역사를 보면 전환기 새로운 역사는 과거에 했던 일반적 공식대로 이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고 의외의 방법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이 전개 된다”고 강조했다.


통일문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통일을 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따지다 보면 한이 없고 너무 할 일이 많다.”며 “그러다보면 통일의 기회가 와도 통일을 못할 수가 있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조건이 문제가 아니고 통일에 대한 국민의 의지와 열망”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또 “일부에서는 지금 통일하면 남북한이 모두 망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같이 허리띠를 졸라매면 된다”고 강변했다.


통일을 결혼에 빗대어 “자신의 이상에 맞는 좋은 상대가 나타나고 사랑한다면 결혼하고 둘이 같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통일도 마찬가지로 기회가 오면 언제든지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족 사항과 사부곡
현 전 수석부의장은 고인이 된 부인 김성애씨와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그는 1999년 7월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유지를 받들어 2억원의 장학기금을 출연, 2000년 1월부터 ‘김성애권사 장학회’를 설립해 운영해오고 있다.


올해까지 17년 동안 제주도내 목회자 자녀 중 고등학생 45명, 대학생 50명 등 총 95명에게 1억52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김 권사는 생전에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몸소 이웃사랑을 실천해 왔는데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제주도내 교회 목회자 자녀들을 돕는 일을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앞으로의 인생 계획과 제주 미래에 대한 제언
현 전 수석부의장은 “제주에서 태어나 자라고, 여러 공직을 거치면서 제주도민들이 보내준 성원과 사랑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며 “무엇보다 다섯 차례나 국회의원을 뽑아준 선거구민들께 진 마음의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항상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까지 도민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제주의 발전과 도민들의 명예를 염두에 두고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제주도는 그 차제가 축복이자 기회”라며 “제주만이 갖고 있는 천혜의 자원과 지정학적 장점을 살리면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특별자치도를 뛰어 넘는 위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제주도를 국제적 관광지, 국제금융 중심지로 발전시켜 나가면서도 제주의 1차산업을 유지.발전시키는 데도 결코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제주 1차산업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회의 발전은 자원이 아무리 풍부해도 인재 육성이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제주 발전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열어 갈 수 있는 휼륭한 인재들을 키워 나가는 데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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